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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모습 다르지만 글로벌 자금 일부일 뿐

중앙선데이 2011.02.27 02:06 207호 10면 지면보기
요즘 사우디아라비아 수도인 리야드는 이슬람 금융의 발전소다. 막대한 오일머니가 리야드에 집중된 뒤 다시 세계 곳곳으로 투자된다. 그곳엔 토착 금융그룹뿐 아니라 골드먼삭스와 JP모건·UBS 등 세계 메이저 금융회사들이 지점이나 현지 법인을 두고 있다. 국제 원유값 급등으로 풍성해진 사우디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아랍 전주(錢主)들의 입맛을 자극하기 위해 최첨단 이슬람 금융기법을 총동원해 토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슬람 금융의 역사

그러나 50여 년 전까지 사우디엔 지폐가 없었다. 현대 금융의 황무지였다는 얘기다. 사우디 왕실은 석유 채굴권을 서방 석유회사들에 주는 대가로 황금을 요구했다. 대상무역의 전통을 따른 거래였다. 달러나 파운드 등 종이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압둘라 술라이만 당시 재무장관은 가로 21m, 세로 21m, 높이 2.4m짜리 금고를 자신의 관저에 설치했다. 서방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원유 채굴 로열티로 지불한 금을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 경제가 되살아나면서 석유 수입이 늘어나자 사우디 왕실은 원유 채굴권 로열티 수입이 급증했다. 황금을 쌓아두는 원시적인 자금관리로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로열티 수입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사우디 왕실은 1952년 중앙은행을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이자를 금기시하는 이슬람 율법(샤리아) 때문에 ‘은행’이란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기묘한 편법이 동원됐다. 이름을 ‘사우디아라비아 금융통화에이전시(SAMA)’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영국 금융역사가인 글린 데이비스는 『화폐의 역사(A History of Money)』에서 그 시절을 ‘이슬람 금융의 암흑기’라고 불렀다. 그 암흑기의 잔상은 8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1차 오일쇼크(73년) 이후 막대한 오일달러가 밀려들었으나 이슬람 왕실 사람들이나 부호들은 고리대를 금지한 샤리아 때문에 막대한 돈을 씨티나 JP모건에 맡겨두기만 했다. 그들은 서방 금융회사들이 수익 배분 명목으로 준 연 1~2% 정도의 돈에 만족해야 했다.

50년 전까진 금 받고 원유 채굴권 넘겨
서방 은행들은 이슬람 금융 암흑기에 금리가 낮은 오일머니에 취했다. 거저나 다름없는 오일머니를 경쟁적으로 끌어다 남미와 아프리카·동남아·한국 등에 빌려줬다. 이는 80년대 초 외채위기로 이어졌다. 미국 라이스대 마하무드 엘가맬(경제학) 교수는 최근 발표한 이슬람 금융에 관한 보고서에서 “무슬림은 외채위기를 계기로 서방 금융회사들이 자신들의 자금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게 됐다”며 “그들은 자신들의 금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자각은 이슬람 금융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수익을 좇는 욕망이 샤리아의 억압을 뚫고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샤리아 에 대한 해석도 유연해졌다. “중세 유럽의 금융이 고리대를 금지한 기독교 교리를 이겨내고 성장한 것과 비슷한 일이 80년대 중반 이후 이슬람 지역에서 벌어졌다”고 영국 금융역사가 데이비스는 말했다. 이른바 전문가들이 말하는 ‘돈의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의 본격화다. 그렇다고 무슬림이 80년대에 금융에 처음 눈을 뜬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한동안 사라졌던 이슬람 금융이 부활했다고 해야 정확하다”고 말했다. 이른바 이슬람 금융의 르네상스다.

이슬람 금융은 기원후 8~12세기 왕성했다. 경제역사가들이 말하는 ‘이슬람 자본주의’가 바로 그때 꽃을 피웠다. 그 시절 서유럽은 금융 암흑기였다. 서로마가 5세기에 무너진 이후 서유럽에선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300~500년 동안 화폐 시스템 자체가 종적을 감췄다. 엘가맬 교수는 “그리스·로마의 금융 지식이 이슬람 지역에서 보존된 뒤 서유럽으로 전해져 근대 금융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모든 금융상품, 율법 따라 심사
이슬람 율법은 모든 인간을 형제로 규정한다. 형제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는 금지한다. 원금 보전 계약도 불가능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도 할 수 없다. 금융회사가 새 금융상품을 내놓을 때는 율법학자나 위원회로부터 샤리아에 어긋남이 없는지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슬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동시에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장치들을 개발했다.

먼저 ‘샤리아 예금’을 들 수 있다. 은행이 이자 대신 연간 순이익 가운데 일부를 예금자에게 지급하는 예금제도다. 수쿠크는 이슬람식 채권이다.

수쿠크 가운데 ‘무라바하’는 금융회사가 부동산을 사들인 뒤 임대료를 받기로 하고 고객과 주고받는 채권이다. ‘이자라’는 서방 금융기법 가운데 리스와 비슷하다. 금융회사가 설비를 구입해 빌려주면서 주고받는다. ‘무다라바’는 금융회사가 특정 사업에 전액 출자하고 이익을 나눠 갖는 방식이고, ‘무샤라카’는 금융회사가 고객과 함께 특정 비즈니스에 투자하고 이익을 나눠 갖는 계약이다. ‘이스티나’는 금융회사가 제조업체의 제품을 생산 전에 사들이는 방식으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거래되는 이슬람 자금이 2010년 말 현재 2조 달러(약 224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유대계 금융사도 이슬람 머니 유치 경쟁
사우디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가 90년대 초 파산위기에 몰린 씨티은행(현재 씨티그룹)에 투자한 것을 두고 미국 일부 개신교계가 잔뜩 경계했다. 반대하는 쪽은 왈리드의 돈을 ‘사탄의 자금’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유대계를 포함해 월가 금융회사들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이슬람 자금을 유치해 되살아나곤 했다. 요즘엔 한 술 더 떠 이슬람 자금을 한 푼이라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아랍계인 하비브 알메드(경제학) 영국 더햄대 교수는 최근 BBC방송과 인터뷰에서 “이슬람 자금은 하루 전까지 미국이나 유럽·아시아 등 원유 수입국의 돈이었다”며 “세계의 거대한 자금 흐름 구조에서 이슬람 지역을 잠시 거쳐가는 돈일 뿐”이라고 말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엔 이슬람 금융이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서방 금융과는 다른 ‘인간의 얼굴을 한 금융’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샤리아가 고리대를 금지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알메드 교수는 “요즘 이슬람 금융이 서구 금융을 닮아가고 있다”며 “이제는 겉모습만 다를 뿐 내용은 별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 돈이 그 돈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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