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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니 21년 전 첫 의상 협찬 배우가 상 타면 디자이너도 스타덤

중앙선데이 2011.02.27 01:31 207호 22면 지면보기
2001년 발렌티노의 블랙 빈티지 드레스를 입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리아 로버츠.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극장에서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다. 할리우드 최대 쇼를 앞두고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어떤 영화가 최고의 영예를 안을지, 어떤 벅찬 소감을 들을 수 있을지, 이변이 벌어질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 합친 것만큼 궁금한 것이 있다. 누가 어떤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을 밟을지다.

아카데미 시상식 숨은 코드 ‘레드 카펫 비즈니스’

아카데미 시상식은 누가 뭐래도 영화계의 축제지만 패션계의 축제이기도 하다. 여배우가 붉은 융단 위를 걷는 동안 드레스는 물론 반짝이는 보석과 손바닥만 한 클러치, 앞코만 살짝 보이는 구두에 시선이 집중된다. ‘누가 잘 입었나’는 ‘누가 상을 받았나’만큼 중요해졌고, 영화 행사가 패션 업계에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됐다.

‘패션쇼 무대의 런웨이가 정극 드라마라면 레드 카펫은 리얼리티쇼’라고 한다. 무표정한 모델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런웨이를 걷는 반면, 여배우들은 풍부한 표정으로 드레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지루한 정극보다 흥미 만점 리얼리티쇼가 관객을 모으는 건 당연. 레드 카펫을 밟는 여배우를 치장해주는 건 패션 브랜드들이 최소 비용으로 최대 홍보 효과를 얻는 방법이다.

2002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극장에서 레바논 출신 엘리 사브의 드레스를 입은 핼리 베리. 이 드레스로 엘리 사브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중앙포토]
줄리아 로버츠 드레스, 1000만 달러 효과
1951년 마들레네 디트리히가 크리스찬 디올을, 1954년 오드리 헵번이 지방시를 입고 아카데미에 참석했지만 과거의 여배우들은 시상식에서 입을 옷을 ‘알아서’ 마련했다. 1955년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레이스 켈리는 영화 의상 디자이너에게 의뢰했고 1958년 조앤 우드워드는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나왔다. 대부분은 LA의 부티크에서 유럽 디자이너의 옷을 직접 샀다.

여기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건 조르지오 아르마니였다. 그는 배우를 치장해주고, 자기 옷을 입은 배우의 사진으로 홍보하는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첫 파트너는 조디 포스터였다. 1989년 여우주연상을 받고도 촌스러운 의상 때문에 웃음거리가 된 그는 “내 옷을 평생 책임져 달라”며 아르마니에게 모든 걸 맡겼다. 1990년 아카데미에선 미셸 파이퍼, 제시카 탠디, 레나 올린 등이 아르마니를 입었다. 톰 크루즈, 덴젤 워싱턴 등 남자배우들도 아르마니 턱시도를 입었다. ‘오스카 어워드’는 ‘아르마니 어워드’로 불렸다. 1993년 아르마니의 매출이 1990년의 두 배로 뛰면서 아카데미 레드 카펫이 노다지라는 게 증명됐다. 다른 브랜드들도 배우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국에서만 최소 4000만 명이 시청한다. 인지도를 높이거나 제품을 홍보하는 데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2000년엔 샤넬의 핑크 시폰 드레스를 입은 니콜 키드먼이 주목받았다. 당시 샤넬 홍보담당자는 “미국에서만 1000만 달러 이상의 효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아카데미 효과를 기대한 불가리는 아예 총 241캐럿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제작했다. 2001년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리아 로버츠의 발렌티노 블랙 빈티지 드레스도 1000만 달러대 효과를 본 성공 사례다. “우리 옷을 입어 달라”는 50여 곳의 제안 중에서 선택한 드레스였다.

브랜드가 최고의 광고효과를 거두는 것은 드레스를 입은 배우가 수상할 때다. 2002년 흑인 여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핼리 베리는 엘리 사브(Elie Saab)의 드레스를 입었다.
레바논 출신의 디자이너로 유럽·중동의 왕족과 억만장자 등 소수의 고객을 대상으로 했던 엘리 사브는 단숨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버건디 컬러 드레스를 입은 핼리 베리가 오스카 트로피를 안은 장면은 아카데미 역사의 주요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1000만 달러 홍보효과’라는 건 이처럼 한 번 협찬이 수년간의 무료 홍보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매출도 오른다. 보통 사람들은 향수나 스카프, 지갑, 핸드백 등 ‘저렴한 생활 명품’을 사거나 로고가 잔뜩 박힌 제품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브랜드들은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영국에 본사를 둔 구두 브랜드인 지미추는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 1주 전 LA 페닌슐라 호텔에 ‘오스카 스위트’를 만든다. 스타일리스트들이 드레스에 맞는 구두를 골라 갈 수 있도록 전시하는 공간이다. 드레스 아래 잘 보이지도 않는 구두가 “남은 기간의 매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지미추 측의 설명이다. 창업자인 타마라 멜론도 파이낸셜 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아카데미를 통해) 미국에서 빨리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스타들의 몸값도 올랐다.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보석·구두·가방 등이 건네진다.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브랜드 행사를 빌미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아예 현금이 오가는 경우도 있다. 2005년 골든글로브 시상식 땐 샤를리즈 테론이 원래 착용하기로 한 해리 윈스턴 보석 대신 쇼파드의 귀걸이를 하는 대가로 100만 달러 이상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거래는 에이전트가 조율한다. 귀걸이를 협찬 받으면 올림 머리를 해야 한다거나, 브랜드 이름을 몇 번 이상 언급해야 한다는 식으로 조건이 붙는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레드 카펫 비즈니스’의 최대 대목이긴 하지만 다른 시상식, 유럽의 영화제에도 카펫은 깔린다.

골든글로브는 아카데미만큼 중요하게 여겨진다. 지난가을 컬렉션에서 선보였던 봄·여름 신상품이 매장에 걸리기 전인 1월 중순에 개최되기 때문이다. 골든글로브 수상 결과가 아카데미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처럼 골든글로브 패션은 봄 신상품에 대한 반응을 살피는 시험대가 된다. 또 영화 스타와 TV스타까지 총출동하기 때문에 더 주목받는 것도 이유다.

반면 미국 방송계 최대 행사라는 에미상은 ‘B급’ 평가를 받는다. 시상식이 열리는 8월은 패션계에서 아주 애매한 시기다. 다음 해의 봄·여름 신상품을 선보이기엔 이르고, 가을 상품을 내놓을 때도 아니다. 그런데다 미국만의 행사다. 샤넬·디올·베르사체 등 유럽 브랜드는 미국의 드라마 배우에게 관심이 없다.

김연아 입은 ‘맥앤로건’ 한국 레드 카펫서 떠
우리나라에서도 레드 카펫 패션은 영화제·시상식의 하이라이트가 됐다. 페라가모·에스까다 등이 여배우들이 즐겨 입는 브랜드다. 드레스를 입은 배우의 사진이 뜨면 문의 전화가 이어진다. 기성복 라인, 스포츠웨어 라인 등 서브 브랜드의 매출로도 연결된다. 페라가모의 레드 카펫 드레스는 판매되기도 했다.

국내 디자이너가 레드 카펫을 통해 유명해지기도 한다. 2008년 부부 디자이너가 선보인 브랜드 맥앤로건(Mag & Logan)이다. 그해 말 문근영이 입고 SBS 연기대상을 받으면서 주목받았다. 2009년 부산영화제에선 17명의 여배우가 맥앤로건을 입었다. 지난해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힌 김연아가 파티에서 입은 블랙 미니드레스도 이들이 만들었다. 오효정 매니저는 “요즘엔 파티 문화가 발달해 누가 입었던 드레스를 사고 싶다는 고객도 많다”고 말했다.

이보현 디자이너의 ‘수콤마보니’도 레드 카펫에서 인기 있는 구두 브랜드다. 지난해 김정은이 대종상에서, 김윤진·손예진이 부산영화제에서 신는 등 여배우들이 찾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최근 베를린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은 임수정은 정구호 디자이너가 특별히 디자인한 블랙 드레스를 입었다. 그는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자리에서 한국 디자이너의 옷을 보여주고 싶다”며 해외 명품 브랜드 대신 정구호 디자이너를 선택했다.

패션 저널리스트로는 첫 퓰리처상을 받은 워싱턴 포스트의 로빈 기번은 금융위기 당시 할리우드 배우들에게 말했다.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살아남도록 돕고 싶다면 그의 옷을 사 입고 레드 카펫에 서라.” 레드 카펫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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