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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낯설게 하면서 마음에 맺히는 작품을 본 적 있습니까”

중앙선데이 2011.02.26 03:00 207호 4면 지면보기
서상익의 ‘길들여지지 않기’(2010), 145.5x112.1㎝, 캔버스에 유채
젊은 작가 서상익의 그림 ‘길들여지지 않기’에는 텅 빈 캔버스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관람객들이 묘사돼 있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좋은 작품이라니까 열심히 바라보지만 요령부득의 현대 미술은 관람객들에게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텅 빈 무엇인지도 모른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제프 쿤스를 괜찮은 작가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형편없는 작가라 한다. 이런 논쟁 속에서도 그의 작품을 240억원에 구입한 ‘세계적인 바보’가 있으니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그 ‘세계적인 바보’의 혜안을 이해 못 하는 우리야말로 궁극의 바보가 아닐까?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10> 매튜 키이란의 『예술과 그 가치』

불행하게도 현대 미술을 이해 못 해서 악명을 떨치는 바보들의 리스트는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미국의 상원의원 알폰소 다마토는 의회에서 안드레 세라노의 ‘오줌예수’ 복사본을 찢어버리는 사고를 쳤다. 전 뉴욕 시장인 줄리아니는 ‘센세이션’전에 출품된 크리스 오필리의 작품에 대해 반대하다 미술 관련 책자에 그 이름이 실렸다.

이 분야에서 가장 높은 악명을 얻은 것은 단연 히틀러다. 1937년 나치 주도로 개최된 ‘퇴폐미술전’은 독일의 위대한 정신을 타락시키는 미술들을 선보이는 전시였다. 여기엔 당시 독일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던 칸딘스키, 샤갈, 몬드리안, 말레비치, 파울 클레, 코코슈카, 뭉크와 피카소 등 20세기 초반의 최고 작가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의 작품 100여 점이 소각되거나 헐값으로 경매에 넘어갔다. 어리석은 지도자가 국부를 어떻게 탕진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악명 높은 ‘바보들’의 대열에서 벗어나 똑똑한 관람자가 될 수 있을까? 도대체 좋은 작품이란 어떤 것인가?

매튜 키이란의 『예술과 그 가치(Revealing Art)』(북코리아, 2010, 1만7000원)는 좋은 작품, 평범한 작품, 나쁜 작품에 대한 우리의 고민에 힌트를 준다. 이 책의 첫째 장점은 사고의 구체성이다. 점잔 빼는 영어 문체의 미묘한 뉘앙스 때문에 무턱대고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지점에서 어떤 사유가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것, 즉 사고의 조직화 과정도 배울 수 있다.

르네상스 작가로부터 현대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에 대한 풍부한 레퍼런스도 훌륭하다. 기괴하게 뭉그러진 사람을 그린 프랜시스 베이컨, 시체를 그리는 제니 사빌, 벌거벗은 나체를 그리는 루시앙 프로이트의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론적 축복이 내려진다. 데미언 허스트나 트레이시 예민 같은 작가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훌륭한 우군이 생길 수 있다. 지적이면서도 세련되고 점잖은 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품을 구별하는 안목을 키우고 싶다면 “예술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반응을 탐험하라”고 매튜 키이란은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좋은 예술이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삶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다. 반면 나쁜 작품은 당대의 취향에 굴복하며, 경험의 확장이라는 문제의식이 없고, 단선적인 주장을 반복하는 작품들이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면서 정신의 지평을 확대하는 예술이 제시하는 내용은 때로 상식을 넘어서 부도덕해 보이기도 하고 그 형식은 새롭다 못해 기괴하고 낯설어 보일 수 있다. 지금 당신을 불편하게 하면서도 마음에 맺히는 작품이 바로 그런 작품일 확률이 높다. 바로 “그런 그림들을 꾸준히 바라보고 그것들에 반응하는 것은 우리를 보다 식별력 있는 지각자로 만든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좋은 작품들은 ‘시간의 테스트’를 견디어내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클래식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문제는 테스트할 시간을 갖지 않고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소위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다. 이 중 옥석을 가려 미래의 클래식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계적인 바보’에서 ‘세계적인 성공한 컬렉터’가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저자가 제시하는 기준은 여전히 막연해 보인다. 삶에 대한 어떤 측면에서의 통찰력인지, 어떤 새로운 지각 경험을 제공하는지는 작품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절대로 몇 개의 기준으로 표준화가 되지 않는 영역이 바로 예술의 영역이다. 통계학적인 지표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다수의 오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영역이 미술의 영역이기도 하다. 1907년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지구상에 열 명이 채 안 되었다. 사정은 30여 년이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프랑스 정부는 이 작품의 구입을 망설였고, 결국 이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 미국에 팔려갔다.

저자는 동시대를 시장의 압박이 점점 교묘해지는 가운데 창작력이 고갈돼 ‘재활용된 것의 끝없는 재활용’ 현상이 두드러진 시대라고 진단한다. 데이비드 호크니를 포함한 일부 탁월한 예를 제외하고는 “그저그런 평범한 작품들의 시대”라는 것이다. 르네상스와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시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대가 그래왔듯 말이다.

결국 이야기는 다시 ‘안목’이라는 비학구적인, 직관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 같다. 서구식 표현으로는 ‘취향의 형성’인데, 키이란은 이것을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 속에서 경향적으로 체득되는 것이라 말한다. 포도주나 커피를 마셔봐야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낼 수 있는 것처럼, 예술 감상은 직접적인 감상의 반복을 통해서만 세련되어진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충고로 책을 끝맺는다.

“무엇보다도 감상자는 예술가가 하려는 것에 개방적이어야 하고,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취미의 섬세함을 위한 노력은 도덕적인 분별력이나 이해와 마찬가지로 끝이 없는 과정이다. 내적인 삶을 도야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당신이 히틀러의 대열에 서지 않으려면 몸을 더 낮추어야 하고 예술가들이 쏟아내는 다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미술 관련 글을 쓰는 것이 주업인 나의 경험에 비춰 말하자면 이 ‘내적인 삶을 도야’하는 과정은 힘든 만큼 즐겁다, 정말로.



이진숙씨는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미술 작품에서 느낀 감동을 전하는 일을 업으로 여긴다.『러시아 미술사』『미술의 빅뱅』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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