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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유려함과 한국 발레의 테크닉 ‘섬세한 만남’

중앙선데이 2011.02.26 02:56 207호 5면 지면보기
솔직히 미심쩍었다. 24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개막한 국립발레단의 ‘지젤’ 말이다. 이번 ‘지젤’은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 버전이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 부예술감독인 파트리스 바르가 안무를 맡았고(이번 공연을 위해 그는 세 차례나 내한했다), 바르와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 온 로이자 스피나텔 리가 무대와 의상 디자인을 책임졌다. 세계 최고의 ‘지젤’ 전문가들이 의기투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해외 장인이라는 이름만 거창할 뿐 막상 결과물은 초라했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래서 이번 국립발레단의 ‘지젤’이 전석 매진의 화려한 신화를 쌓아 올렸다고 해도 ‘겉만 번지르르한 작품 아냐’란 게 내 속마음이었다.

국립발레단 ‘지젤’, 24~2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하지만 의외였다. 결론적으로 9년 만에 다시 올린 국립발레단의 ‘지젤’은 전통의 유려함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한국 무용수들의 뛰어난 테크닉을 눈으로 확인시켜준 무대였다. 24일 첫 공연을 관람했다. 우선 눈에 들어온 건 낭만 발레의 상징인 파스텔톤 무대였다. 군무 역시 통일성이 돋보였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인’ 장인 안무가의 섬세함이 군무의 발끝 하나, 손끝 하나에 머물러 있었다. 패전트 파드되를 선보인 김리회·이동훈 커플의 기량이 조금 아쉬웠지만 이를 보완하기에 충분할 만큼 군무의 동작엔 생동감이 넘쳤다. 1막 시골마을의 축제 분위기는 부족함 없이 흥겨웠다. 2막에서도 정교함은 곳곳에 살아 있었다. 시인 고티에가 마리화나 연기를 보며 지젤을 구상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최대한의 가벼움으로 공중부양의 환상을 표현하기 위한 흐트러짐 없는 상체와, 정확한 기교로 안정감을 주는 하체 움직임의 조화가 모든 윌리들의 자태에 담겨 있었다.

‘지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버전과 비교했을 때 프랑스 버전은 섬세함과 고상함이 강점이다. 러시아 발레가 기교 중심인 데 비해 프랑스 발레는 감정 표현을 우선한다. 프랑스냐, 러시아냐라는 구별이 얼마나 큰 차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먼지만 한 디테일에서 명품이 탄생하는 법. 발레 미학의 절대미는 그 현미경 같은 미묘함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지젤은 프랑스 발레다. 1841년 파리에서 초연했을 당시의 원작에 가장 가깝게 복원했다”고 단언한 안무가 바르의 자신감은 이번 무대에서 그대로 입증됐다. 낭만주의 대표적 정서인 서정미를 정교한 테크닉 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특히 2막의 윌리(처녀 귀신) 군무가 압권이었다. 윌리들이 모여서 알브레히트를 둘러싸고 빠른 걸음으로 죽음의 길로 몰아가는 장면은 섬뜩하게 다가왔다.

아쉬움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백조의 호수’ ‘지젤’이 세기를 뛰어넘는 명작으로 자리잡은 건 극단의 충돌이 가져오는 긴장감이 작품 전체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조의 호수’는 백조의 순수함과 흑조의 매혹미를 동시에 표현해야 한다. ‘지젤’ 역시 1막에선 순수한 시골 처녀, 2막에선 성숙한 사랑의 윌리를 표현해야 한다. 이런 공식에 따른다면 이날 ‘지젤’을 연기한 김주원은 지나치게 2막에 치우쳐 있었다. 양손을 앞으로 모아 감싸고, 한 발을 뒤로 들어 균형을 잡는 아라베스크 동작에서 김주원의 긴 목선은 특히 돋보였다. 빠른 발걸음을 걷는 부레 동작은 혼령을 보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로 빨랐다. 반면 1막에서 김주원의 연기는 순진한 청순미보단 노련미에 가까웠다. 후배 격인 김현웅과의 파트너십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야 할까. 1막의 지젤은 순진무구할수록, 연약함이 강조될수록 아름답기 때문에 그러기엔 김주원의 세련미가 지나쳐 보였다.

9년 전 국립발레단이 마지막으로 올렸던 ‘지젤’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이번 공연은 탁월했다. 당시는 원작을 바탕으로 마리위스 프티파가 수정 안무한 러시아 버전을 또다시 한국이 재안무했다는 얘기가 돌 만큼 다소 산만하고 애매했다.

반면 이번 ‘지젤’ 공연은 비록 외국 안무가의 주도하에 만들어졌지만 뚜렷한 색깔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한, 대한민국의 ‘지젤’을 탄생시켰다. 반드시 한국 창작발레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우리의 정서를 담은 우리의 언어로 만든 창작물이 아닌 이상, 고전은 고전다울 때 가장 빛나게 마련이다. 국립발레단 ‘지젤’은 전통의 생명력과 한국 발레의 기량이 만나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입증해 준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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