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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뿐이’ 할머니를 위해

중앙선데이 2011.02.26 02:56 207호 5면 지면보기
‘그대를 사랑합니다.’ 제목부터 진중한 이 영화를 간단히 ‘황혼의 로맨스’나 ‘노인들의 사랑이야기’라고 말한다면 어딘지 모자라다. 천만 네티즌을 울리고 웃겼다는 만화가 강풀의 강력한 스토리, 생생한 캐릭터, 선한 정서를 연기 경력 합산 200년의 원로배우들이 절절하게 풀어내는 영상. 그 속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묵직한 물음과 함께 가슴이 아득해지는 허무의식, 그럼에도 삶을 낙관하겠다는 의지가 버무려져 있다. 우리에게 예정된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피할 수 없지만,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이별이 있기에 만남이 아름다운 것 아니겠느냐는.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한평생 이름 없이 살아온 송씨 할머니가 김만석 할아버지를 만나 ‘이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맺게 되는 관계와 갖게 되는 추억들. 인생이란 결국 ‘관계 맺기’와 ‘추억 쌓기’의 연속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복잡한 관계 속에서 행복을 좇아 많은 추억을 만들며 살지만, 점차 ‘언제 죽어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가 되어가면서 관계들은 단순해지고 추억들도 희미해져 간다. 부부로 시작한 두 사람이 가족이 되었다가 다시 부부로 돌아가고, 홀로 남겨지기도 한다. 치매에 걸려 평생 동안 쌓아온 추억을 오롯이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허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인생사다.

새로운 사랑에 설레는 만석 커플과 오래된 사랑을 놓지 못하는 군봉 커플은 대조적이면서도 닮아 있다. 먼저 떠난 아내에 대한 예의를 우선하거나 치매에 걸린 아내조차 애틋하게 사랑하고, 죽음으로 이별하기를 거부하며 사랑을 묻어버리거나 아예 죽음까지 동행하기를 택하는 것은 다치기 쉬운 관계에 대한, 놓치기 쉬운 추억에 대한 안타까운 의리다.

세월은 품 안의 자식마저 내 관계의 틀에서 빼앗아가고 인생은 점점 고독을 향해 간다. 그러나 김만석 할아버지의 낡은 오토바이 소음에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이웃주민들, 어쩌다 오토바이 소리가 안 들리면 늦잠을 자고 소음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마음들은 가족이나 부부가 아닌 또 다른 형태의 관계의 중심에 내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소액의 보조금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송씨 할머니에게 감동해 앞다퉈 작은 보탬이라도 주고자 애쓰는 동사무소 직원들. 아름다운 관계의 시작에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작은 배려와 감사의 표현 정도로 충분하다.

인생이란 젊어서 추억을 만들고, 나이 들면 추억을 되씹으면서 사는 것이라고 했던가. 치매로 집안에만 갇혀 지내다 오랜만에 맛본 바람을, 꽃과 달을 느끼던 어느 날의 추억을 죽는 날까지 소중히 간직하는 군봉의 아내 순이. 살아있다면 죽기 직전까지도 추억을 만들고 싶어하는 애처로운 인간의 소망을 본다.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는 관계가 필요하다. 관계를 위해서는 이름을 불러줘야 ‘그대에게’ 꽃이 될 수 있다. 송씨 할머니에게 이름이 필요한 이유다.

오늘, 거리의 풍경 속 엑스트라일 뿐이었던 이웃들의 이름이 문득 궁금해진다. 내 인생에 조연일 뿐이었던 가족과 친구, 동료의 모습이 내 미래의 추억에 소중한 주인공임을 깨닫는다. 숱한 관계를 뒤로 한 채 눈을 감을 때 떠오르는 추억이란 어떤 모양일지. 부디 행복한 순간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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