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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국물에 된장 풀고 조개 넣고 … 입안 가득 봄향기

중앙선데이 2011.02.26 02:30 207호 10면 지면보기
참 혹독한 겨울이었다. 아직 몇 번 더 추위와 폭설이 있을 수 있지만, 음식에는 벌써 봄기운이 돈다. 그토록 싱싱하게 맛있었던 김장김치가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대신 시장에 새로 나온 봄나물에 눈길이 간다. 이제야말로 김치로 국도 끓일 수 있는 계절이 되었다. 김칫국에 계절이 있겠느냐 싶지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싱싱한 김장김치를 푹푹 끓여 국으로 먹는다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지 않은가. 남편이 김칫국을 좋아해서 김칫국 해먹자고 몇 번 졸랐지만, 내가 매몰차게 거절했다. 봄부터 여름까지 김칫국은 실컷 먹을 텐데, 뭐 겨울부터 김칫국이란 말인가. 게다가 김칫국이나 김치찌개는 폭 익은 신 김치여야 제 맛이니, 신 김치가 지겨워진 때가 바로 김칫국 끓여 먹을 제철인 셈이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50> 봄을 알리는 냉잇국

결혼 전까지 나는 김칫국은 늘 고기를 넣은 김칫국만 먹어보았다. 고기 좋아하는 중부지방 입맛 때문이다. 다진 쇠고기를 조금 넣고 신 김치와 콩나물을 넣어 폭 끓인 김칫국은 시원하고도 감칠맛이 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부산 출신 남편은 시원한 국에 고기를 넣는 것에 딱 질색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된장국과 김칫국이었다. 쇠고기 된장국, 쇠고기 김칫국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음식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 시원하고 깨끗한 된장과 김치 맛에, 왜 고기 누린내를 섞느냐는 것이다. 남편의 선택은 단연 멸치였다.

결혼한 여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도 남편 입맛을 따라갔다. 하지만 음식이란 내 손으로 하는 것이고, 내가 맛을 보며 만드는 것이다. 내 입에 맛이 없으면 음식은 만들 수가 없는 법이다. 고깃국의 들척지근한 맛을 즐기는 내 입맛이, 멸치의 시원한 국물 좋아하는 남편의 입맛과 결합한 결과는, 아주 진한 멸치 국물을 내는 것이었다.

김장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너무 고춧가루가 많은 김치는 속을 좀 털어 물로 한번 헹구어 넣는다. 김칫국은 시원한 맛으로 먹는 것이니, 찌개처럼 너무 빨간 국물은 별로 맛이 없다. 시원한 맛을 내는 콩나물을 넣어도 좋다. 그리고 국물 내는 큰 멸치를 꽤 넉넉히 넣는다. 그렇게 푹 끓여낸 국물은, 고깃국 못지않은 감칠맛이 나면서도, 기름기 하나 없이 말끔하고 시원한 국물이 된다. 미리 우려낸 멸치 국물에 김치를 넣고 끓이면 깨끗하고 좋은데, 그럴 시간이 없으면 그냥 함께 넣어 끓여도 된다. 국그릇에 큰 멸치 몇 마리가 들어와 있으면 어떠랴. 건져내면서 먹으면 되는 것을.

이렇게 늦겨울부터 끓여먹기 시작하는 김칫국은 가을까지 먹는다. 물론 국과 찌개는 김장김치로 끓여야 제 맛이니, 끓여먹을 용도의 김장김치는 귀물 취급을 받으며 김치냉장고에 고이 모셔져 있다.

김칫국이 겨울의 끝을 알리는 국이라면, 냉잇국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국이다. 냉이는 이파리를 그냥 드러낸 채 월동을 하는데, 적갈색으로 다 죽어가는 듯한 그 이파리가 날이 풀리기가 무섭게 생기를 되찾으며, 가운데에서는 싱싱한 새 이파리가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겨울의 언 땅에서 새롭게 솟아나는 가장 강한 기운을 담고 있는 냉이는, 이렇게 처음 나올 때가 가장 향도 진하고 맛있다.

된장 냉잇국은 조개로 끓여야 제 맛이다. 같은 된장국일지라도 넣는 식물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단백질 재료가 달라진다. 아욱은 새우와 잘 어울리고, 근대와 배추는 멸치가 제 맛이다. 그런데 원추리·쑥·냉이 등은 뭐니 뭐니 해도 조개로 맛을 내는 것이 최고다.

흔히 서울 사람들은 여기에도 또 고기를 넣는 경우가 많다. 고기로 감칠맛의 기본을 내어놓고, 된장 풀고 끓이면서 조개를 넣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식은 조개의 깨끗한 맛을 죽이기 십상이다. 조개 외에 고기를 넣는 것은, 조개만으로는 충분히 감칠맛을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에도 멸치 국물을 쓰는 것이 좋다. 일단 멸치 국물로 감칠맛의 기본을 만들어 놓는데, 이때에는 너무 멸치 냄새가 강해 나중에 넣을 조개의 향을 잡아먹으면 안 된다. 중멸치를 쓰거나 대멸치를 쓸 경우에는 마른 냄비에 한 번 살짝 볶아서 비린내를 조금 날리는 것이 좋다.

내가 초보주부일 때에는 냉이 다듬는 것을 좀 두려워해 냉이 사기를 꺼렸다. 엄마가 냉이를 한 바구니 놓고 잔뿌리 속에 있는 흙까지 긁어내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냉이는 부드러운 밭 흙에서 재배해 나오는 것이 많아 예전의 냉이들보다 상태가 훨씬 깨끗하다. 지나치게 지저분한 이파리가 눈에 띄면 떼어내고, 미지근한 물에 조금 담가 놓으면 웬만한 흙은 쉽게 씻긴다. 찬물로 여러 번 헹궈 보아 더 이상 흙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씻으면 안심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늘 문제는 두려움이다. 해보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어려울 것이라 지레 짐작을 하는 것이다.

조개도 마찬가지다. 시장에서 해감을 다 해놓은 조개를 팔기 때문에 그리 번거롭지 않다. 냉잇국에는 모시조개가 최고다. 그러나 역시 값이 문제이니, 보통은 바지락을 쓰게 된다. 그것도 비싸다면 값싼 홍합을 조금 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멸치 국물을 내놓은 것에 된장을 푼다. 쌀뜨물을 받아 넣으면 좋고, 혹시 없으면 찹쌀가루를 조금 풀어도 좋다. 기호에 따라 잘 씻은 냉이에 볶은 콩가루를 묻혀 넣는 사람들도 있다. 국 맛이 훨씬 고소해지지만 대신 맑은 맛은 그만큼 떨어진다.

된장이 끓으면 맨 마지막으로 냉이와 조개를 넣는다. 만약 조개의 살을 포기할 심산이면 된장 끓일 때부터 넣어 푹 익혀도 좋다. 국물 맛은 좋아지지만, 조갯살은 질기고 단단해져 맛이 없어진다. 값싼 홍합 조개를 쓴다면 처음부터 푹 끓여 국물만 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냉이 역시 조개와 함께 넣는다. 요즘 나오는 냉이는 그리 질기지 않아 오래 끓이지 않아도 충분히 무른다. 너무 큰 냉이는 세로로 절반을 찢어서 넣으면 먹기에 더 편하다.
된장의 구수한 맛에 실린 향긋한 냉이 향이 입맛을 돋운다. 와, 이제 정말 봄이구나!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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