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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일본 경찰에게 아리랑 가르쳤다”

중앙일보 2011.02.26 02:12 주말섹션 6면 지면보기



오사카 총영사 임명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





정부기관의 인사란 게 늘 그렇듯 최근 발표된 외교통상부의 재외 공관장 인사에서도 약간의 시비가 있었다. 주 오사카 총영사에 임명된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을 두고서다. 이미 두 차례 일본 근무 경력이 있고 현지에 마당발 인맥을 구축하고 있어 ‘준비된 총영사’란 평가가 나올 법도 하지만, 그를 따라다니는 ‘용산 사건’의 꼬리표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2009년 1월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 ‘용산 참사’ 당시 경찰 지휘관이었다. 농성 철거민 5명이 숨지고, 경찰관 1명이 순직한 용산 사건으로 그는 경찰청장 취임을 코앞에 두고 제복을 벗었다. 그랬던 그가 2년 만에 직업외교관들의 자리로 치부되는 오사카 총영사에 임명되자 항간에선 ‘보은 인사’란 말이 나돌았다. 용산 사건으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자리는 내놓아야 했던 데 대한 보상 아니냐는 것이었다.



글=예영준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김 총영사 또한 세간의 수군거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 한편에 서운한 마음이 생기는 게 인지상정이지요. 하지만 적임자가 임명됐다고 격려하는 분도 많습니다. 내 지난 경력을 아는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죠. 결국은 일로 평가받는 길밖에 더 있습니까. 경찰이든 외교관이든 나라를 위한 일이란 점에선 매한가지니까요.” 다음달 6일 오사카 부임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를 만나 일본과의 인연과 새로운 직책에 임하는 각오, 용산 사건 2년을 맞는 소회 등을 물었다.



● 2년 동안 어떻게 지냈나.



 “경찰 그만두니 처음에 많은 분이 밥 먹자, 소주 한잔 하자고 했다. 고맙긴 했지만 매일 소주 폭탄주 마시면서 하는 얘기들이 똑같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짐을 싸서 미국으로 갔다. 보스턴 대학에 적을 두고 미국은 어떻게 법질서가 확립돼 있는지 유심히 살펴봤다. 현직 경찰관들과 대화를 많이 하고, 유치장이나 교도소도 여러 곳 둘러봤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은 미국 경찰이 법 집행을 엄정히 잘하는데, 특별히 자질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공권력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9·11 8주년 추모식 현장에 직접 갔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조셉 바이든 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진심으로 소방관, 경찰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모습을 봤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관이나 소방관들이 다시 국민의 인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느낀 점과 경찰 생활 30년 동안의 기록들을 묶어 책도 한 권 썼는데 이번에 갑작스레 총영사 발령이 나는 바람에 출판은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경찰 재직 때부터 일본통으로 유명했는데 일본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나.



 “1990년 경정 때 공무원 국비 유학시험에 합격해 일본 경찰대학에 갔다. 일본 경찰대학은 고교 졸업생이 가는 곳이 아니라 일본 전국의 경찰 조직에서 경감으로 승진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간부 교육기관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나중에 경찰서장이 될 수 없다. 당시 동기생이 382명인데 이 중 절반 정도가 현재 일본 전국의 경찰서장을 맡고 있다. 도쿄 시내 경찰서장 절반도 내 동기생들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경찰의 업무 영역이 훨씬 크기 때문에 경찰을 통해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총영사의 업무 중 중요한 게 우리 동포들이나 체류자, 여행객들을 돕고 보호하는 일인데 그런 점에서 일본 경찰과의 인맥이 두터운 것은 총영사직 수행에 큰 자산이라 생각한다. 동기생뿐 아니라 경찰 수뇌부와도 절친한 사이다. 경찰을 그만둔 뒤 지인들의 초청을 받아 가보니 일본의 전·현직 경찰 수뇌부들이 총출동해 환영행사를 베풀어줘 나도 깜짝 놀랐다. 안도 다카하루 경찰청 장관(경찰청장 격), 이케다 가쓰히코 경시총감(서울경찰청장 격)과 절친하다. 한국의 국가정보원장 격인 내각정보관을 지냈고 지금은 일본인 납북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미타니 히데시 역시 경찰 출신으로 가족들끼리도 교분이 각별하다.”



●경찰대학을 졸업했다는 것만으로 인맥이 쌓이는 건 아닐 텐데.



 “오사카 총영사관에서 3년, 도쿄의 한국대사관에서 3년씩 근무하면서 경찰 이외 분야에도 많은 사람을 알게 됐다. 지난 연초에 일본 내에 있는 지인들에게 800통의 연하장을 보냈다. 우표 값만 100만원이 넘는다.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공을 들여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처음엔 쉽지 않지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성의를 갖고 대하면 신뢰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일본 경찰 동기생 가운데는 내가 우리 민요 ‘경기아리랑’을 보급시킨 에피소드를 지금도 말하는 사람이 많다. 경찰대학 다닐 때 ‘문화제’에서 내가 뭔가 한국적인 것을 알려야 했기에 한복 차림으로 ‘아리랑’을 불렀다. 그 준비를 하느라 아리랑에 대해 조사해 봤더니 일본 경찰로부터 탄압을 받아 금지된 노래였다. 일제시대 춘사(春史)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이 경찰에 체포돼 가면서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인데, 당시 단성사의 관객들이 모두 그 노래를 합창했다. 당시 영화관에는 맨 뒷자리에 경찰관이 항상 앉아 관객의 동태를 감시했다. 그 이후 아리랑이 상영 금지되고 노래는 금지곡이 됐다. 그런 역사를 가진 노래의 가사를 일본어로 써 전 동기생에게 나눠준 뒤 합창했고, 그 이후에도 노래방에 갈 때마다 아리랑을 일본 경찰들과 같이 불렀다.”



●용산 사건으로 화제를 바꿔 보자. 지금 같은 직위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최대한 안전 진압을 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불상사가 생겨 희생자가 난 것은 정말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내 친구 중에 스님이 있는데 그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천도재를 지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작전에 대해서는 지금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마찬가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아니라 다른 경찰 간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현장에 직접 가보니 수도 한복판에서 화염병이 날고 염산병이 떨어져 건물 바로 앞 도로를 지나는 차량들이 곡예 운전을 하고 있었다. 이를 어떻게 무한정 방치할 수 있나. 그 과정에서 김남훈 경사가 순직한 것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 사람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임무였기 때문에 꽃다운 나이에 순직한 것이다. 그 죽음을 높이 평가해야 하고 용산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후 지금까지 폭력시위가 일어나지 않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당시 경찰청장 취임을 눈앞에 두고 사퇴했는데 스스로 결정한 것인가.



 “처음엔 사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당한 법 집행이었고 지금도 똑같은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런데 당시 경찰청장에 내정돼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었는데 내가 스스로 사퇴하지 않으면 야당에서 국회 문을 닫겠다고 했다. 그때가 미국발 금융위기가 덮친 때였다. 경제 현안 대책이 시급한데 늦어질수록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가게 돼 있었다. 나 하나의 거취문제로 국민에게 피해를 줄 순 없는 것 아닌가. 고민 끝에 내가 먼저 그만두겠다고 했다. 청와대에서 고민은 했겠지만 나한테 그만두라고 한 적은 없다.”



●얼마 전 용산 사건 2주년이었는데.



 “부하의 목숨을 지키지 못한 지휘관으로서 죄스러운 마음은 평생 갈 것 같다. 김남훈 경사 영결식 때 마지막 운구를 보면서 거수경례를 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나오더라. 2주기 무렵 김 경사의 아버지께 식사를 대접하고 위로해 드렸다. 그런데 오히려 그분이 나를 더 걱정해 주시더라. 그래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내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 것, 그게 바로 김 경사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라고.”



김석기



1954년 경북 경주 출생. 영남대. 동국대 대학원 졸업. 경찰 간부후보생 27기(수석 졸업), 일본 경찰대 본과 76기 졸업. 경북·대구지방경찰청장, 경찰청 차장. 서울지방경찰청장, 주일 한국대사관 외사협력관 역임.



j 칵테일 >>



“쓸데없는 일 하지 말라”

포돌이 만들기까지 10년












김석기 총영사의 e-메일 주소는 ‘podoricreator’로 시작된다. 현재 경찰을 상징하는 마스코트인 포돌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경찰청 방범과장 시절인 1999년 고향 후배이기도 한 만화가 이현세씨에게 부탁해 그린 것이다. 부처님만큼 큰 귀로 ‘국민의 말씀’을 잘 듣고 부릅뜬 눈으로 국민의 안전을 잘 지키겠다는 다짐을 담은 것이다. 김 총영사는 “실은 포돌이 아이디어를 갖게 된 것도 1990년 일본 경찰대 유학 시절”이라며 “당시 일본 경시청의 마스코트 ‘피포’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말했다. 마스코트를 잘 활용하면 국민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경찰로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그는 귀국 후 경찰 간부들에게 여러 차례 마스코트 제작을 건의했지만 “쓸데없는 일 하지 말라”며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결국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되기까지는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김 총영사는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의 ‘피포’를 창안한 사람은 안도 현 경찰청 장관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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