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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무르팍 역사공부를 시키자

중앙일보 2011.02.26 00:22 종합 30면 지면보기






정진홍
논설위원




# 매일 오후 10시 전후면 잠자리에 들던 올해 열 살 된 어린 딸이 봄방학이란 핑계로 자정이 넘도록 자려 하질 않았다. 잠을 잊은 딸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문득 아이가 물었다. “왜 삼일절에 만세운동을 하게 됐느냐?”고. 학교에서든 텔레비전을 통해서든 삼일절도 들어봤고 그날 만세운동을 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정작 그걸 왜 했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에서 독립하려고 만세운동을 한 것’이라고 말해줬지만 아이는 곧장 “일제 식민지가 뭔데?”라고 되물었다. 결국 그 일이 계기가 돼 아버지와 딸은 함께 역사공부를 하기로 했다. 공부라고 해봐야 무슨 교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인 내가 아이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뿐이다.



 # 먼저 개략적인 시대 구분부터 아이 눈높이에 맞춰 얘기하기 시작했다. 단군할아버지의 고조선부터 부여·옥저·예맥 등을 거쳐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시대, 그리고 발해와 통일신라의 남북조시대, 나아가 고려와 조선,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굵직한 줄거리를 훑었다. 그러고 나서 백 년 전 나라를 잃고 식민지가 된 상황부터 구체적인 얘기를 풀어나가자 딸은 귀를 쫑긋 세워 들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직전에 함께 봤던 ‘마이 프린세스’라는 드라마에서 이설이란 이름의 공주가 순종황제의 손녀로 그려진 대목이 자주 나온 탓인지 딸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을 알고 있었다. 우스운 것 같지만 그런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과 소재들이 중간중간 디딤돌 역할을 해줘서 어린 딸은 내가 풀어주는 역사 이야기를 자기 나름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 그런데 더욱 재미난 것은 아빠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어린 딸은 다음날 가사도우미 할머니를 붙잡고 고스란히 반복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날 밤에도 딸은 기다렸다는 듯이 역사 이야기를 해달라며 아예 주제를 잡아왔다. 이번엔 이순신 장군 이야기다. 나름 역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1545년에 태어난 곳인 마른내 즉 건천동이 바로 아빠가 태어난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이라는 이야기부터 해주자 딸의 눈은 더욱 반짝반짝 빛났다. 역사 속의 위대한 장군과 아빠가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린 딸에게 역사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된 셈이다. 그렇다. 역사는 살아 있다. 아빠와 딸의 현재적 대화 속에!



 # 1928년 인도의 초대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는 열 살이 되던 딸 인디라 간디에게 태고의 세계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몇 통의 편지에 담아 보냈다. 그 후 그것은 소책자로 출간되기도 했지만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네루가 인도의 독립투쟁을 위해 싸우다 아홉 번씩이나 투옥되던 중 여섯 번째 옥중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인 1930년 10월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딸에게 편지를 써서 인도와 세계의 역사를 가르쳤다. 그렇게 옥중에서 쓴 200여 통의 편지는 훗날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세계사 편력(Glimpses of World History)』이다.



 # 여기 1933년 8월 9일에 네루가 여섯 번째 옥중생활의 청산을 33일 앞두고 어린 딸 인디라 간디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의 한 대목이 있다. “나는 네게 역사의 골격을 담아 많은 편지를 썼다. …네가 역사를 애정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 무심한 골격은 살과 피를 갖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가 될 것이다. …게다가 역사의 장을 펼쳐 그것을 움직이는 힘을 찾아내려 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이고 배울 수 있다.” 그렇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배운다. 그래서 역사를 알아야 한다. 단지 학교의 교과과정에서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가정 속에서 아버지의 무르팍 위에서 역사를 배워야 한다. 그래야 달력 속에 그저 빨간 활자로 박제된 삼일절과 같은 날의 역사가 다시 피가 돌며 그만의 의미와 가치와 숨결을 우리에게 토해낼 수 있지 않겠나. 그런 나라 그런 국민이어야 미래도 있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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