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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아슬란의 원칙과 희생, 그리고 나니아의 봄

중앙일보 2011.02.26 00:20 종합 31면 지면보기






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




C S 루이스(Lewis)의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옷장』은 41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서 1억2000만 권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2005년 극장 영화로 제작돼 국내에서도 개봉된 바 있다. 가상의 나라 나니아의 지도자 아슬란은 달콤한 순간의 유혹 때문에 마녀에게 영혼을 빼앗긴 에드먼드를 구하고 오랫동안 계속된 마녀의 땅 나니아의 겨울을 종식시키기 위해 굴욕적이고 비참한 죽음의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한 아슬란은 결국 마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니아 제국에 화려한 봄을 불러온다. 아슬란은 나니아의 존경받는 맹주로서 원칙을 충실히 지켰고 결국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나니아의 위기를 극복했다. 조직과 사회를 제대로 이끌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원칙과 희생이라는 이야기를 C S 루이스는 우리에게 매우 흥미롭게 전해 준다.



 지난 16일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에 괴한이 침입한 사건은 그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더욱이 사건의 은폐를 위해 외부 윗선이 개입되었다는 의혹은 이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정보기관의 어설픈 공작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경찰의 뒷북 수사 의혹, 정보기관 내부의 권력투쟁설도 구설에 올랐다. 정보 당국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 정부와 기업의 통상대표도 외국에 나가면 이런 일을 흔히 겪는다고 한다. 외국 특사단 숙소를 침입한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치밀하게 공작하지 못한 채 코미디 스파이 쇼에 그친 것이 바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이 대목에서 눈앞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이 합리화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다. 우리 국민들은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또한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들은 이 사건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또한 묻고 싶다. 치열한 산업정보 전쟁의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명분만 있다면 용납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남들이 다 하므로 우리도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설득력이 약하다. ‘국가 이익’이라는 목적과 주어진 상황이 무엇이건 이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명쾌한 규정과 준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나라가 이러한 사안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상식과 원칙만 생각하면 된다. 이는 우리 모두의 품격, 그리고 자존감과 관련된 또 다른 ‘국민 이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T-50 고등훈련기의 수출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 국가적으로 큰 경제적 손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원칙과 신뢰를 저버린다면 우리는 이로 인해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안 그래도 정부 정책에 확고한 원칙이 없기에 우리는 항상 불안하다. 과학벨트와 영남 신공항 논란에 대한 지자체들과 정치권의 주장에 어떤 원칙이 있다고 믿기 힘들다. 여당과 야당이 경쟁적으로 제시하는 무상의료·무상급식 등 복지정책에도 어떤 원칙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며칠 새 말을 바꿔 저축은행 영업정지 결정을 내린 금융정책을 국민들이 믿고 따를 이유가 없다. 이런 식으로라면 대학은 학생들에게 시험 중 부정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부정행위를 하다가 적발되는 것이 문제라고 가르쳐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논문의 표절도 용인될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원칙은 늘 깨지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정말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인가 질문하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원칙의 반대어가 ‘무원칙’이나 ‘편법’이 아니고 ‘관행’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원칙은 분명 있지만 또 다른 관행을 무시할 수 없으니 때에 따라 원칙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도 묵인된다는 매우 현실적인 변명들에 우리는 아주 익숙하다. 눈앞의 이익과 처세, 그리고 임시방편이 중시되는 우리 사회 내부 관행의 동력 때문이다.



 우리 정보기관뿐 아니라 대학과 기업, 그리고 정부도 치열한 고민과 논의를 통해 나아가는 방향과 방법의 원칙을 확고하게 설정하고 이에 반하는 기존의 관행을 과감히 거부할 수 있는 신념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총체적으로 주관하고 관리하는 일이 바로 지도자의 책무다. 달콤하지만 매우 치명적일 수 있는 유혹들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켜줘야 한다. 아슬란에게 처참한 죽음의 순간은 분명 피하고 싶었던 독배였다. 아슬란은 그 어려운 길을 택했다. 그래서 최후의 승리자가 됐다. 나니아의 봄은 이렇게 힘든 선택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졌다.



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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