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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중공군과의 대회전 (275) 휴전을 맞이하다

중앙일보 2011.02.24 00:18 종합 10면 지면보기

“한국군 이렇게 강해질 줄 몰랐다” 콜린스, 금성 전투 격찬

1953년 7월 촬영한 무장 상태의 국군 모습이다. 장소와 정확한 시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금성 돌출부를 공격한 중공군에 맞서 국군은 병력과 화력, 장비 등을 신속하게 전선으로 투입하는 현대전 수행 능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국군은 적을 앞에 두고도 휴전을 받아들여야 했다. 사진 전문 잡지 라이프에 실린 작품이다.

군사력을 지칭하는 ‘병(兵)’에 대한 내 생각은 앞에서도 잠깐 서술한 적이 있다. 과거의 중국에서는 병의 본질을 흉(凶)하다고 봤다. 내 생각도 그 점에서는 같다. 그 바탕을 말하자면 병은 손에 쥔 흉기(凶器)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나를 위협하는 상대가 있을 경우 병은 내 가족과 내 사회, 나아가 그 총합(總合)인 국가를 지키는 방패이자 보루(堡壘)다. 사회의 근간을 유지하고, 국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병을 갈고 닦아 그 역량을 높이 쌓아야 한다. 나를 위협하는 적을 내 곁으로 다가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병이요, 담을 넘어 우리의 평화와 안전을 흔들려는 적을 물리치는 것도 병이다.

 그런 점에서 60년 전의 대한민국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를 스스로 지키는 군사력의 확보가 아주 절박했다. 미국과 유엔 참전국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공산주의 북한과 중국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그다음에는 우리 스스로를 적의 침공에 맞서 지켜낼 수 있는 국방력의 증강이 절실했던 것이다.

 중공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1953년 7월 금성 돌출부를 공격해 왔고, 국군이 이를 막아냈다는 사실은 나중에 국군의 순조로운 전력 증강으로 이어진다. 미군은 당시의 전투를 아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국군이 만약 중공군에 맥없이 무너져 금성 돌출부를 내주고, 나아가 화천 저수지까지 빼앗겼다면 미군의 한국군 증강 계획은 차질을 빚을 수 있었다.

 그전까지 추진해 왔던 국군 증강 프로그램이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을 경우 미군은 모든 국군 증강작업을 원점으로 돌리거나, 적 앞에서 투지를 세우지 않는 한국군을 신뢰하지 못해 막대한 장비와 화력·물자가 들어가는 전력 증강 작업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군은 보란 듯이 중공군을 막아냈다. 미군은 이 점에 크게 만족했다. 로튼 콜린스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은 회고록에서 이 대목을 언급했다. 그는 금성 돌출부에 다가선 중공군이 국군의 총반격에 물러난 것을 두고 “한국군이 이 정도로 성장한 줄은 몰랐다”고 감탄했다.

 금성 전투는 국군의 현대전 수행 능력을 보여줬다. 앞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현대전은 빠른 시간 안에 병력과 화력, 장비를 신속하게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승패를 가른다. 미군의 일부 지원이 있기는 했으나, 국군은 막대한 물량을 전선으로 신속하게 실어 나르는 보급 능력을 이 전투에서 보여줬다.

 제주와 논산 등의 훈련소에서 양성한 병력은 서울을 거쳐 열차 편으로 춘천까지 재빨리 움직였고, 무기를 비롯한 장비 등은 경춘가도를 가득 메운 군용 트럭으로 끊임없이 전선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움직여 먹구름처럼 몰려와 금성 돌출부에 사납게 비를 내렸던 대규모의 중공군 병력을 물리칠 수 있었다.

 국군이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경춘가도를 메우며 장비를 실어 날랐던 트럭은 민간에서 징발했다. 민간 트럭을 징발하기 위해 당시 책임자였던 육군본부 군수국장 백선진 준장(후일 재무장관 역임)은 특무상사 복장으로 갈아입고 부산의 거리를 돌아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 모든 사람의 힘이 합쳐져 대한민국 국방력은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눈앞에 몰려오는 적을 보고서 한번 싸워 보다가 힘이 부치면 맥없이 물러나 등을 보였던 전쟁 초기의 국군은 이제 튼튼한 시스템을 등에 업고 투지를 세울 수 있었다.

 미군은 휴전 뒤 국군 증강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다가 한국군 최초의 야전군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40만 병력을 이끌고 길고 긴 휴전선을 단독으로 막아내는 거대한 야전군이었다. 미군은 그런 국군 야전군 창설을 승인했고,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은 금성 전투에서 전선을 이끌었던 내게 그 지휘를 맡겼다. 꼼꼼한 성격 때문에 국군을 믿지 않던 테일러 사령관이 그때에야 비로소 대한민국 군대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국가를 지키는 간성(干城)이 만들어지는 장면들이다.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는 나중의 기회에 펼치겠다. 금성 돌출부에 몰려든 중공군을 막아낸 뒤 우리에게 닥친 것은 휴전이었다. 길고 길었던 싸움이 일단 휴지(休止) 상태로 접어드는 그런 휴전, 유엔군 측과 공산 측이 2년을 끌어온 지루한 협상이 결국 마무리 지어지는 그런 휴전이 바로 코앞에 다가선 것이다.

 휴전을 맞이하는 내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어디 나뿐이었으랴. 갈라진 국토를 그대로 지켜봐야 하는 심정, 적을 앞에 둔 채 전쟁을 일단 끝내야 하는 마음, 두고 온 가족과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없는 이산(離散) 동포들의 설움…. 그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대한민국 2000만 동포의 비애는 한결같았다.

 그러나 불가항력이었다. 휴전을 강하게 반대하면서 미국과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던 이승만 대통령도 그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직전까지 적 앞에 칼을 세웠던 우리도 그 휴전을 맞아야 했다. 53년 7월 27일, 길고 험난했던 싸움을 통해 양측이 서로 확보했던 지역을 경계로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면서 드디어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휴전협정 조인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나를 경무대로 불렀다. 대통령은 “휴전협정 조인 때에 국군 대표를 판문점에 가도록 하는 게 낫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판단할 사안은 아니었다. 대통령 또한 분명히 내게 묻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통령은 이어 “가지 않는 게 좋겠다”면서 말문을 닫았다.

 대한민국 국민 모든 이의 정서와 생각을 감안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대통령은 결국 판문점에 한국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다. ‘향후 휴전으로 인해 빚어지는 모든 문제는 미군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휴전은 그렇게 다가왔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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