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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정 … 평생 꿈꾸던 지순한 여자 역, 할머니 돼서 해보네요

중앙일보 2011.02.16 00:08 종합 25면 지면보기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출연한 대학로의 여왕 윤소정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지금 내 옆에 있는 반려자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윤소정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흐르는 눈물을 참기 힘들 것이다. 늘그막의 사랑을 이리도 저릿하게 끌어낼 수 있을까.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17일 개봉)에는 평생을 불행하게 살다 뒤늦은 사랑을 만나 행복을 맛보는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치매 걸린 아내 곁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지켜주는 남편도 있다. 이순재·윤소정·송재호·김수미 네 명의 노(老)배우가 열연한다. 이들의 나이 도합 275세. 평균 69세다. 충무로에서 보기 드물게 기획된 ‘실버영화’다.



 이중 동네 홀아비 만석(이순재)과 황혼의 사랑을 키워가는 송이뿐 역을 연기한 배우 윤소정(67)을 14일 만났다. 지난해 연극 ‘에이미’‘33개의 변주곡’‘그대를 속일지라도’등으로 대한민국연극대상·히서연극상 등을 받으며 ‘대학로의 여왕’임을 재확인했던 그다. “연극무대에선 늘 제가 대한민국 최고 배우라고 감히 자부했어요. 하지만 영화는 별 인연이 없었어요. 이 나이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되니 행복하고 감사해요.”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말, 인사치레가 아니다. 1962년 100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TBC 탤런트 공채 1기로 선발돼 50년이 다 돼가지만,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역할이기 때문이다. 파지(破紙) 줍는 일로 생계를 잇는 이뿐은 소녀 같은 수줍음을 안고 사는 할머니다. 만석이 준 머리핀이 너무 좋아 잘 때도 꽂고 자고, 러브레터를 읽으려 몰래 한글을 배우는 여자다. “한국적이고 지순한 여자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이뿐 역을 제안을 받았을 때 믿기지가 않아서 ‘아니, 다른 배우들 놔두고 왜 나를?’ 이랬다니까요.”



 ‘못돼 먹은 여자’만 했던 건 서구적인 외모 탓이었다. 큰 눈, 높은 코, 시원시원한 입매. 요즘 같아선 의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일부러 만드는 이목구비이련만. “건방지고 성질 나빠 보인다고 못된 시누이 같은 역만 들어왔어요.” ‘올가미’(97년)에서 아들한테 병적으로 집착하는 사이코 시어머니 역은 그런 고정관념을 굳혔다.



“67년 영화 ‘콩쥐팥쥐’에서 문희씨가 콩쥐를 하고 제가 팥쥐를 했어요. 그 영화를 설날만 되면 TV에서 방영했는데, 우리 딸(배우 오지혜)이 어릴 적에 그걸 보더니 엉엉 우는 거예요. ‘엄마는 왜 못된 팥쥐를 했느냐’면서. 길 가다 사람들한테 ‘못된 여자 간다’고 돌 맞은 적도 있다니까요.”(웃음)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만화가 강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2008년 연극으로도 선보여 지난해까지 17개 도시에서 12만 관객을 동원했다. “연극 출연 제안이 먼저 왔었어요. 그땐 만화도, 제작자도 잘 몰랐던 터라 ‘유명배우 내세워서 장사하려 그러나’ 싶어 거절했죠. 나중에 영화사에서 만화를 보내왔길래 별 생각 없이 읽었어요. 세상에, 이 나이에 만화 보고 펑펑 울었어요. 저에게 이런 소녀 같은 모습이 숨어있는 걸 알아봐준 추창민 감독한테 고마울 따름이죠.”



 슬픈 결말이지만 “퍼지고 앉아 울고불고 하는 신파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절제했다”는 그는 자신에 대한 불만도 털어놓았다. “ 서 있는 자세나 걸음걸이에서 가난에 찌든 흔적이 안 보였어요. 어떻게 살아왔는지 손짓 하나에서도 보이게 해야 하는데…내가 참 못했구나, 가슴을 쳤죠.”



 그는 “이런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화라면 언제라도 불러달라”고 거듭 말했다. “아버지(고 윤봉춘 감독·1902∼75) 덕분인지 영화는 늘 친정 같아요. 몇 장면 나오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왕의 남자’ 인수대비 역은 딱 한 신이었는데도 했잖아요. 단, 아무 역이나 하진 않아요. 대한민국 최고의 연극배우가 아무 거나 할 수는 없잖아요. 송이뿐 같은 배역 어디 또 없을까요?”(웃음)



글=기선민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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