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 클립] 럭셔리 브랜드 이야기 [6] 프라다

중앙일보 2011.02.16 00:06 경제 14면 지면보기



트렁크 덮는 방수천 보고 “바로 이거” … 나일론 가방이 명품 되다





패션계에선 때론 전문용어보다 쉽게 통하는 말이 있습니다. ‘프라다 천’도 그중 하나죠. 양털부츠를 ‘어그’, 피케셔츠를 ‘폴로티’라고 하는 것처럼. 구김이 안 가고 방수가 되는 소재를 흔히 ‘프라다 천’이라고 합니다. ‘프라다 천’은 브랜드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관리가 까다로운 다른 명품들과 달리, 일반인이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 제품을 내놓는 프라다의 특징이 드러나기 때문이죠. 세련되면서도 ‘보통 사람을 위한 패션’을 추구하는 프라다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도은 기자



가죽 명문가 외손녀, 미우치아 프라다









2009년 서울 경희궁에는 시시각각 4가지 형태로 변신하는 건축물 ‘프라다 트랜스포머’가 세워졌다(작은 사진). 내부에서는 프라다가 2004년부터 세계 순회 중인 ‘프라다 스커트 전시회’가 열렸다






프라다의 탄생은 1913년 여행가였던 마리오 프라다가 이탈리아 밀라노에 최고급 가죽 전문 매장을 열면서 시작됐다. 주요 제품은 여행용 가방, 가죽 액세서리, 화장품 케이스 등이었다. 디자인이 이국적이고 고급스러워 당시 밀라노 부유층이 결혼이나 여행을 앞두고 꼭 들러보는 매장으로 입소문이 났다. 하지만 제1·2차 세계대전은 프라다에 큰 타격을 입혔다. 고급 소재를 구할 수 없을뿐더러 경제상황도 꽁꽁 얼어붙었던 탓이다. 이런 가운데 1958년 마리오 프라다가 세상을 떠나자 운영권이 불투명해졌다. 두 딸이 이어받았지만 이렇다 할 히트 상품 없이 파산 위기에 처했다.



78년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창업주의 외손녀, 미우치아 프라다였다.



48년 태어난 미우치아는 원래 다른 길을 걷고자 했다. 그는 밀라노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공산당원·팬터마임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독립이 미우치아에겐 시급했다. 패션에 대한 재능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른 옷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익숙했다. 소녀시절엔 남들처럼 스타킹을 신는 대신 하얀 발목 양말로 멋을 냈고, 시위에 나갈 때조차 이브 생 로랑의 옷을 입을 정도였다.



사업을 맡자마자 미우치아에게 행운이 따라왔다. 현재의 남편인 파트리지오 베르텔과의 만남이었다. 미우치아는 어느 가죽 박람회에서 프라다 가방 모조품을 팔고 있는 베르텔을 발견했다. 이를 따지는 미우치아에게 베르텔은 사과하는 대신 당돌한 제안을 했다. 가방만이 아닌 구두까지 사업 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기센 사람들끼리의 언쟁’은 서로를 끌리게 했다. 미우치아는 베르텔을 고소하는 대신 프라다 제품 단독 생산권을 주며 사업 파트너로 삼았고 이후 연인으로, 부부로 발전했다. 부인은 디자인을, 남편은 생산과 판매를 책임지면서 프라다는 고속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프라다를 알린 가방 하나









프라다의 대표 상품인 나일론 가방. 1978년 미우치아는 낙하산 소재였던 포코노 원단을 이용해 이 가방을 만들었다.



미우치아는 디자인에 집착하기보다 색다른 소재를 찾는데 공을 들였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쉽게 택하지 않는 특이한 원단을 좋아했다. 이런 과정에서 나온 세계적 히트 상품이 ‘프라다 가방’이다. 사람들이 프라다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나일론 소재로 만든 가방과 배낭이 성공하면서부터다.



미우치아가 나일론천의 ‘프라다 가방’을 개발한 것은 78년. 프라다를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할아버지와 다른 판매전략을 고민했다. 할아버지가 최고급 재료로만 엄선해 가방을 만들었다면, 젊고 실험적인 미우치아는 생각이 달랐다. 명품 가방이라고 해서 꼭 가죽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가죽 제품은 사치스럽고 비싸다고 여겼다. 그러던 중 우연히 포코노 원단을 발견했다. 이 원단은 원래 할아버지가 트렁크를 감싸 보호하는 데 쓰던 방수 천이었다. 천막이나 낙하산 등 군수품용으로 주로 쓰이던 합성섬유이기도 했다. 미우치아는 포코노의 장점에 주목했다. 포코노는 무엇보다 가벼우면서도 튼튼했다. 커피를 엎질러도, 비를 맞아도 물수건으로 닦아내면 새 것같이 반지르르해졌다. 그는 포코노 원단에 모서리만 가죽으로 감싼 ‘프라다 가방’을 디자인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써오던 ‘프라다 밀라노’라는 로고를 넣은 삼각 금속 장식을 붙여 명품의 이미지는 유지했다.



처음엔 시장 반응이 시큰둥했다. 튀는 멋도 없고 너무나 단조로운 디자인 탓이었다. 하지만 미우치아는 판매에 자신이 있었고 생산을 계속했다. 결국 출시된 지 10여 년이 지난 90년대 초 ‘프라다 가방’은 전 세계적으로 뜨는 ‘잇백(당대의 대표적인 백)’이 됐고, 패션의 흐름까지 바꿔놓았다. 면·마 등의 천연 소재를 벗어나 합성 소재를 사용한 패션 제품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 것이다.



미니멀 디자인으로 의류 사업 진출









프라다 창업주의 외손녀인 미우치아 프라다(왼쪽)와 남편 파트리지오 베르텔.



‘프라다 가방’으로 세계적 인기를 얻은 프라다는 88년부터 의류 사업에도 진출했다. 그리고 밀라노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최초의 컬렉션을 선보였다. 처음엔 시장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세 번째 컬렉션부터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절제미를 강조한 디자인이 인기를 끌었다. 미우치아는 얼룩덜룩한 군복형 코트, 목까지 꽉 잠근 미니멀 디자인의 코트 등을 잇따라 히트시켰다. 프라다의 신상품을 사기 위해 고객들은 번호표를 들고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그는 의류 사업 영역을 넓혀갔다. 93년엔 10~20대를 겨냥한 브랜드 ‘미우미우’와 남성복 ‘워모’를 출시했다. 의류 사업의 성공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96)의 의상을 맡으면서 절정에 달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광택이 돋보이는 흰색 드레스(미우미우)와 로미오의 심플한 정장(워모)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프라다는 97년 ‘빨간줄 로고’로 잘 알려진 프라다 스포츠 라인도 선보였다.



프라다 제국의 위기, 사들인 브랜드 되팔다



99년 3월 프라다는 ‘X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세계 각국의 브랜드를 인수해 ‘프라다 제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프라다는 우선 헬무트 랭(미니멀리즘을 표방하는 대표적 디자이너)을 영입했다. 이어 한 달도 못 돼 질 샌더도 영입했다. 질 샌더 또한 ‘미니멀리즘의 마녀’라고 불릴 정도로 복잡한 디자인과 불필요한 장식을 피하는 디자이너였다. 이후 프라다는 다양한 브랜드를 인수했다. 영국 신발 브랜드 처치,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펜디 등을 사들였다. 안경·향수 등 다양한 제품의 판매허가와 라이선스도 따냈다.



하지만 명품 제국으로 도약하는 듯했던 프라다는 2001년 미국 뉴욕에서 9·11 테러 등의 여파로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위기를 맞았다. 판매부진과 이자부담 등으로 2002년 프라다의 빚은 16억 유로(약 2조4118억원)에 달했다. 빚을 갚기 위해 프라다는 사업 확장은 중단하고 비싼 값을 치르고 사들인 브랜드들을 다시 팔아야했다. LVMH(루이뷔통 모에 헤네시 그룹)에 펜디 지분 25.5%를 매각했다. 2006년엔 질 샌더와 헬무트 랭도 처분했다. 이후 프라다는 위기를 벗어났다. 여러 브랜드를 매각했지만 프라다는 여전히 미우미우·처치·카슈 등을 거느린 명품 브랜드다. 프라다는 현재 세계 65개국에 310여 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다.



서울에서 열린 프라다 트랜스포머



프라다의 문화예술 지원은 독창적이다. 1993년 미우치아 부부는 지금의 프라다 재단(Fondazione Prada)의 전신인 ‘프라다 밀라노 아르테’를 설립했다. 평소 현대 예술에 관심을 가져온 부부의 ‘외도’였다. 우선 예술가들의 전시공간을 밀라노에 마련했다. 처음엔 설치미술가 엘리세오 마티아시, 나노 프란치나, 데이비드 스미스 등의 작품을 전시했다. 95년 프라다 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뒤엔 사진·디자인·건축까지 대상을 넓혔다. 부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예술가와 프라다의 공동작업까지 벌였다. 이는 애니시 카푸어, 데미안 허스트 등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는 계기가 됐다.



프라다 재단과 예술가들의 공동 작업은 2009년 4월 서울에서도 펼쳐졌다. 서울 경희궁 앞에 세운 건축물 ‘프라다 트랜스포머’가 그것.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와 함께 작업한 ‘트랜스포머’는 육각·원형·십자·사각형 등 사면체로 이뤄진 특이한 모양이었다. 4개의 기중기를 이용, 회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구조물이 4가지 형태로 변신할 때마다 재단이 마련한 영상프로그램이 펼쳐졌다. ‘건축물은 움직일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이다. ‘트랜스포머’에서는 프라다가 2004년부터 세계 순회 중인 스커트 전시회 ‘웨이스트 다운’이 열리기도 했다.



*독자와 함께 만듭니다 뉴스클립은 시사뉴스를 바탕으로 만드는 지식 창고이자 상식 백과사전입니다. 뉴스와 관련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e-메일로 알려주십시오. 뉴스클립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newsclip@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