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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경영] 제 1화 멈추지 않는 자전거 54년 ② 히트상품 ‘용각산’ 탄생비화

중앙일보 2011.02.16 00:00 경제 4면 지면보기



터도 안 판 공장 설계도만 내놓고 “일본 용각산 기술 달라”



일본 류카쿠산 기술자들과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맨 오른쪽)이 용각산 생산설비를 둘러보고 있다. 당시 용각산은 일부 부유층만 먹을 정도로 귀했다.





2011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일본 류카쿠산(용각산)을 3대째 경영하고 있는 후지이 류타 사장에게서 새해 인사를 묻는 전화가 걸려 왔다. 아시아 시장에서의 용각산 판매에 관한 얘기도 잠시 나누었는데, 후지이 사장의 요점은 “보령제약이 용각산 생산과 판매에 있어 아시아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년이 넘는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일본 제약기업 대표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참 격세지감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옛날 생각에 잠겼다. 보령약국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가 만든 약을 팔다가 보령제약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직접 약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64년. 하지만 그때는 창덕궁 옆 서울 연지동 우리 집 마당에 당의기와 분쇄기 같은 기본 시설만 갖추고 소량의 원료를 사다가 갈아서 항생제를 만드는 수준이었고, 그래서 ‘제약’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그래도 영업실적이 괜찮아서 1966년 서울 성수동에 부지를 사서 공장 건설을 준비했다.



 당시 우리나라 제약업계는 연구개발(R&D) 부문에서 초기 단계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당장은 외국업체와 기술제휴를 맺어 선진 제약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나 또한 일단 앞선 제약기술을 배운 뒤 머지않아 우리의 고유 기술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갖게 됐다. 내가 특히 관심을 가진 분야는 생약제제. 한약재가 풍부한 국내 상황으로 보거나 우리 고유의 전통 한약재를 신뢰하는 국민 정서를 보거나 한약재 효능을 십분 되살린 약품을 개발한다면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생약제제 개발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본 류카쿠산 중역과 서울 성수동 공장터를 둘러 보는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가운데).



 열악한 국내 연구실태를 확인한 나는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전 세계적으로 생약에 관해 가장 활발한 연구와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 일본이었던 까닭이다. 내 관심을 끄는 결정적인 일본 약품 하나가 있었다. 그동안 비공식 루트를 통해 이따금 국내로 들어오다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공식적인 수출입 창구를 통해 소량 수입되고 있는 진해거담제 ‘용각산(龍角散)’이었다. 용각산은 140여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일본 전통의 생약이었고, 18세기 중엽부터 일본에 갓 들어온 서양의학이 전통적인 약효와 접목되면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부유층만 용각산을 접하고 있었지만, 그 탁월한 약효만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다. 그때 우리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공장 근로자나 대도시 시민들을 중심으로 기관지 계통 질병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에게 140년 역사를 가진 진해거담제를 널리 값싸게 공급하는 게 내 바람이었다.



 우선 이미 세계적인 기업이 되어 있는 일본 류카쿠산에 기술제휴 의중을 묻자 우선 우리 자본금과 매출액, 직원 수, 생산설비 등 상세한 자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난감했다. 성수동 공장은 1967년 준공 예정으로 착공도 못한 상태인데 무슨 수로 생산설비를 보여준단 말인가. 연지동 집 마당에 있는 설비를 보여줬다가는 기술제휴는커녕 “누구 놀리느냐”고 욕을 얻어먹을 판이었다. 나는 일본으로 가서 새로 건설할 성수동 공장 설계도를 내놨다. 이런 공장을 지을 예정이니까 믿어달라는 식이었다. 물론 일본 측 반응은 냉담했다. 콧방귀를 뀌다가 재차 면담 요청을 해도 아예 회사 문밖에서 들여보내지도 않았다. 나는 일단 한국으로 돌아와 매일 우체국에 가서 담당자 중역에게 전화를 했다. 국제전화가 비쌀 때여서 길게는 못 해도 짧게 통화를 하며 엉뚱하게 안부도 묻고 우리나라 날씨 얘기도 꺼냈다. 중역이 전화를 안 받으면 비서에게 “한국에서 용각산을 만들 보령제약 김승호 사장”이라고 계속 메시지를 남겼다. 때로는 우리 회사 간부사원을 일본으로 보내 성수동 공장 부지에 터 파기가 진행되는 사진을 일일 단위로 보여주도록 했다.



 그러기를 6개월, 마침내 일본이 백기를 들었다. 아니 사실 백기를 든 게 아니라 너무 귀찮아서 반응을 보인 것뿐이었다. 1966년 6월 일본 류카쿠산이 실사를 위해 부사장과 기획관리실장을 파견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연지동 공장을 방문하겠다는 그들을 차에 태운 뒤 나는 성수동으로 향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가만히 있더니 왕십리를 지나자 공장이 있다는 시내 대신 허허벌판으로 가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직 땅도 고르지 않은 성수동 공장 부지로 데려갔다. “보십시오. 첨단 설비의 공장이 보이지 않습니까. 용각산이 한국에서 성공할 거라 믿는 사람에게만 공장이 보일 겁니다. 만약 저 공장이 보이지 않는다면 두 분은 용각산의 품질이나 효능에 대해 자신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저 일본 안에서나 통하는 약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들은 한참을 있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차에 올라탄 부사장이 한마디 했다. “공장 잘 봤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966년 12월 나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류카쿠산의 후지이 야스오 사장과 기술제휴 계약을 맺었다. 적어도 지금 40대 이상의 우리 국민이라면 한번 이상은 접했을 용각산의 기적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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