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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부자가 되는 길

중앙선데이 2011.02.12 21:49 205호 31면 지면보기
“엄마, 이게 웬 궁상이야?” 장갑을 찾는 딸에게 10여 년간 써 온 나의 낡았지만 튼실한 가죽장갑을 내놓은 뒤 들은 핀잔이다. 세월의 흔적 대신 딸은 1만원짜리 싸구려 장갑을 택했다. 한철 쓰고 필요하면 내년에 또 사겠다는 작정이다. 세상에 갖고 싶은 것 천지인 새내기 대학생 딸에게 ‘의식 있는 소비, 절제의 경제’를 어떻게 가르칠까? 설 연휴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었다.

세월의 태엽이 뒤로 빠르게 감기면서 1980년대 초 나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있다. 선진 학문을 배워 고국의 발전에 보탬이 되겠다는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교수들은 시장과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이야말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역설했다. ‘성장주의’ 사상교육을 나도 모르게 받고 있었다. 하지만 10여 년의 미국생활 경험은 내게 또 다른 진실을 보여 주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두 사건은 미국식 ‘부’의 양 극단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리라. 첫 번째 경험은 유학 초기, 미 동북부 오지에서 전기도 수도도 없이 문명을 등진 생활을 하는 일단의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이들은 거의 모든 식량을 자급자족하며 가족 단위로 살고 있었다. 연 100달러 정도의 재산세를 낼 만큼만 도시에서 일한다는 한 가장은 “두 딸을 도시에서 키우려면 나와 내 아내는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할 정도로 일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하루 종일 함께 있을 수 있지요”라고 설명했다. 거창한 철학도 종교도 아닌, 단순한 생활의 필요에서 시작된 그의 오두막은 온갖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마을에서 한 사람을 아는 것은 곧 모두를 알게 되는 것이었다. 이 집 저 집 다니며 시 낭송을 듣고 포크 댄스를 배웠으며 애플 파이를 맛있게 굽는 법도 전수받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이들처럼 타인에게 친절하고 개방적인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없다. 소유를 포기하면 인성이 바뀌는가? 아니면 원래 착한 사람들이 단순함과 나눔의 삶을 택하는 걸까? 그곳은 내 마음의 월든(Walden)으로 자리 잡았다.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인간의 모든 선택과 가치를 숫자로 환원시키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포기한 나는 아이를 기르는 주부가 돼 있었다. 어느 날 동부의 유명한 부자동네를 지나는데 성(城) 같은 집들 옆 넓은 부지에 말들을 기르고 있는 것이 신기해 차를 세우고 아이와 함께 울타리로 다가갔다. 말들이 다가왔다. 그러자 어디선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집채만 한 개들이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혼비백산한 나와 아이는 겨우 차 안으로 피해 목숨을 건졌다. 우리가 울타리를 넘지 않았어도 값비싼 말에게 유해한 행동을 할 수도 있기에 경비견을 풀어놓는 것은 정당방위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을 나중에 변호사 친구로부터 들었다. 정나미 떨어지는 합리성이었다. 사람보다 재산을 존중하는 그들의 풍요는 또 다른 빈곤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이런 물질만능주의를 반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을 목도한다. 지난 30여 년간 ‘성장이 곧 행복’이라던 성장지상주의가 스스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빈부격차에 환경파괴, 급증하는 우울증과 가정해체를 경제성장이 해결하지 못함을 목격한 사람들이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해 왔다. 이들은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고 생태, 지구환경, 평화, 사회정의 그리고 자기표현에 관심을 갖는다.

일상생활과 사회운동 그리고 사회적 기업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한 ‘문화창조자(CC)’들이 조용한 혁명을 시작했다. 이들은 신중한 소비와 의식주의 질(質)을 추구하며 창조적이고 정신적인 경험을 중시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000만 명이 이 새로운 조류에 동참하고 있으며, 유럽도 그에 못지않는 수준이라 한다. 나와 지구, 나와 사회, 그리고 나와 내 영혼 간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문화창조운동이 우리나라에서도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자연애호, 워킹, 가족농원, 수공예 등 다양한 형태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진정한 부는 소유가 아닌 관계’라는 사티시 쿠마르의 말에 행복한 미래로 가는 열쇠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헌 장갑 한 켤레에서 인간을 느끼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부유함이며,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풍요로운 사회임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자. 성장세대인 우리에게 남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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