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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전국시대 7웅 연나라와 힘 겨룬 북방 강국

중앙선데이 2011.02.12 20:17 205호 28면 지면보기
1 갈석산에서 바라본 창려현 창려현은 기록에 고조선의 도읍으로 나오는 곳이다. 사기의 “위만은 왕검(王険)으로 도읍을 삼았다”라는 기록에 대한 주석으로 후한의 서광(徐広)은 “창려현에 험독현이 있었다”, 응소(應劭)는 “요동 험독현은 조선의 옛 도읍”이라고 했다. ‘왕검=험독’임을 설명한다. 이 지역은 현재 베이징에서 멀지 않다. 연나라의 침입으로 상실한 이후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이 재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서 봐도 천연 요지임을 알 수 있다. 멀리 발해가 보인다.2 란하 고조선의 도읍지인 창려를 끼고 흐르는 강이다. 3 고조선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비파형동검. [사진=권태균]
⑤고조선의 실체Ⅰ

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고조선의 실체는 무엇인가.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 고조선은 신화의 세계 혹은 문명의 변두리에 있던 세계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에서 고조선의 역사는 유장하다. 공자의 춘추시대에 이미 뚜렷한 자취가 있다. 후대 한반도 왕조보다 역사가 길다. 2000여 년 전 후대들이 한반도로 들어온 뒤 잠긴 고조선의 문을 열려는 노력이 오늘 활발하다.

고려사에 “평양에 도읍한 단군이 전조선(前朝鮮)이고 기자조선은 후조선(後朝鮮)이며… 41대 후손 준왕(準王)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나라를 빼앗아 왕검성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卷58 志 卷12 地理)”라고 한다.

이것이 당시의 역사 인식이었다. 그러나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은 실체가 없다. 위만조선만 불쑥 나타나 사기에 충실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사기의 미스터리다. 이런 기록은 ‘은나라와 기족의 역사를 제외하면 한국사는 BC 190년께 연나라에서 온 중국인 위만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자인하는 꼴이다. 위만 이전, 41대 왕까지 이어져 왔다는 고조선에 관한 구체적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왕궁의 유적이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아 온갖 억측이 난무한다.
고조선과 관련해 한국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이 시경(詩經)의 주나라 선왕(BC
827~782) 때 일이다. “왕이 한후(韓侯)에게 준 것은 그 추족과 맥족(貊族), 북쪽 땅을 받고 제후가 되었다(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大雅)”는 기록이다. 이 한후를 상당수 한국 사학자들은 한국인과 직접 관련이 있는 기록으로 이해한다. 역사의 시작을 중국의 한반도 지배에서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AD 1세기 중반 한나라 때 유명한 학자 모장(毛<8407>)은 시경을 주석하면서 이 구절을 ‘북방의 제후급 인물이 오랑캐를 토벌한 것을 찬미한 것’이라고 했다. ‘한후’는 주나라 왕실의 신하인 제후를 의미하는 것일 뿐 한민족과는 관계없다는 의미다. 한민족을 의미하는 한(韓)의 개념은 당시엔 형성되지도 않았다. 시경에는 한후가 주나라 왕명을 저버리지 않고 밤낮으로 노력하면 제후의 지위를 유지시켜줄 것”이라는 구절과, “한후가 분왕(汾王) 조카딸과 결혼(韓侯取妻 汾王之甥, 大雅)”한 후 그 제후와 연나라 백성의 노고를 치하하는 이야기가 이어질 뿐이다. 즉 주나라 제후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시경에 나오는 ‘주나라 선왕 때 일’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단어는 한후(韓侯)가 아니라 맥족(貊族)이다. 맥족은 예족(濊族)와 더불어 고조선의 근간을 구성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예맥은 관자에 처음 나타난다. 관자(管子)의 “제나라 환공(桓公, ?~BC 643)이 북으로 고죽·산융·예맥에 이르렀다(北至於孤竹山戎濊貊, 小匡)”는 기사가 예맥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고죽은 은나라의 후예로 기족의 영역(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 지역)을 바탕으로 한 나라다. 고조선의 뿌리인 예맥은 요서~북만주에 걸쳐 활동했고 이후 부여와 고구려·전연·북위 등을 건국한 역사 주체다.

이어 전국시대 말기의 순자(荀子)엔 “진(秦) 북쪽으로 호(胡)와 맥(貊)이 접한다(强國)”는 기록이, 사기엔 “진(秦) 승상 이사(李斯)의 글에 ‘저는 (진시황을 보필하여) 북으로는 호맥(胡貊)을 쫓고…(李斯列傳)”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전국시대의 맥은 현재의 내몽골이나 요서 지역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BC 3세기에 편찬된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북해의 동쪽인 이예(夷穢)지방에서는 큰 게와 능어(陵魚)가 난다(北濱之東 夷穢之鄕大解陵魚, 卷20)”라고 한다. 여기서 북해는 발해로 보고 있다. 따라서 BC 3세기를 전후해서는 예족이 이미 요동 지역으로 많이 이동해 와있음을 알 수 있다.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예맥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입장을 종합해 “원래 예가 거주한 요하 동쪽에, 요서나 중국 북방의 맥이 이주해 ‘예맥’을 형성했지만 예맥이 언제 어떻게 하나의 종족 집단을 이루고 동으로 이동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사기 기록에 ‘예맥’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종족 연합체로 등장하고 흉노와 동쪽에서 접경한 사실에서 BC 3~2세기 무렵 예맥이 하나의 종족으로 존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다고 본다”고 했다.
고대 한국인들의 영역은 현재의 베이징에서 북만주 지역에 펼쳐져 있었다. 다만 중앙집중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해 고도의 행정조직을 갖췄다면 남았을 정리된 기록과 사서가 일절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기록은 없어도 역사는 계속됐다.

고조선과 연관된 ‘조선(朝鮮)’이란 단어도 관자에서 처음 나온다. 사실 ‘고조선’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가 만들어낸 말이다. 관자에는 “발조선에서 생산되는 범가죽(發朝鮮文皮, 卷23)”이라고 하면서 “(천금을 주어야) 8000리나 떨어진 오월이 (제나라에) 조공할 수 있을 것이고 범가죽은 금같이 귀하니 그 정도 지불해야 8000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발조선이 조공할 것이다(然後八千里之吳越可得而朝也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卷24)”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이 단독으로 나오지 않고 ‘발조선(發朝鮮)’이라 하여 여러 조선이 있는 것처럼 돼있고, 제나라를 기점으로 오월과 발조선이 모두 8000리로 되어있다. 발조선은 북방이다. 서쪽은 이미 여러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발조선의 남방한계선은 과거 고죽국(孤竹國)의 위치와 대체로 일치한다. 관자는 BC 7세기께 “제나라 환공이 북쪽으로 영지를 정벌하고 부지산(鳧之山)을 지나 고죽을 짓밟고 산융과 대치하였다”(大匡)고 했다. 고죽국이 멸망하고 이 일대는 연나라의 세력 범위에 들어간다. 과거 고죽국 지역이 자연스럽게 발조선의 남쪽 한계선이 됐을 수 있다. 결국 ▶은의 후예인 기국 또는 그 계승 민족이 이 시대에는 발조선으로 불렸거나 ▶이들 기국과 북방에서 남하한 맥족이 혼합하여 발조선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일 수도 있고 고조선의 전 단계 국가일 수도 있다.

따라서 BC 7세기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은 발조선이며 그들의 위치는 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에 이르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발조선의 구체적인 모습은 사료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 지역은 중앙아시아에서 발달된 청동기와 금·은 세공기술의 이동통로로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고 신화적으로는 남방계(난생)와 북방계(천손)의 혼합지역이며,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온돌문화를 발달시킨 지역이다. ‘조선’은 이후 당당한 정치적 주체로 사서에 등장한다.

위략(魏略)에 “과거 기자 이후에 조선후가 있었고 주나라가 쇠퇴해가자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을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왕실을 받들려 했는데,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므로 이를 중지하고 예를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라고 하였다.

조선이 주왕실을 받들었다는 것은 명분일 것이다. 이 구절은 고조선이 전국 시대의 강국 중 하나인 연나라와 힘을 겨룰 정도의 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시 연나라는 수십만의 대군과 700여 대의 전차, 6000여 필의 말, 10년을 지탱할 수 있는 군량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나라 때 전국책(戰國策)은 기록하고 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연이 왕을 칭하고 조선후도 왕을 칭했다는 점이다. 연이 왕을 칭한 것은 역왕(易王, BC 332~321)의 시기. 그러므로 고조선은 전국 칠웅과 유사한 제후국 형태를 유지하다가 BC 4세기께 들어와서는 이미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국 7웅과 어깨를 겨루는 북방의 국가, 이것이 고조선의 실체다.

BC 4세기 이후 고조선과 연나라는 항쟁기에 들어선다. BC 3세기께 “연 장수 진개가 동호(東胡)를 기습하여 동호는 1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다(史記 匈奴列傳)”고 한다. 삼국지에는 “(조선왕의) 자손들이 교만해져서 마침내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은 매우 약화되었다(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裏,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고 했다.(동호가 고조선임은 이미 1회에서 밝혔다.)

만번한은 평북 박천 또는 현재의 랴오양(신채호의 견해) 등으로 비정되지만 랴오양 서쪽(요하 하류)으로 보는 것이 옳다. 요하 지역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645년) 진흙이 200여 리나 돼 인마가 통과할 수 없다… 대습지여서 당태종조차 말의 칼집에 장작을 메었다(寶藏王)”고 나온다. 따라서 연나라 대군이 요하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일대에는 후일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요동성·백암성(白巖城)·안시성(安市城) 등이 건설됐다. 결국 진개는 고조선(동호)의 서부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동호라는 단어가 사기에 처음 등장한 이후 ‘조선후’라는 말은 주로 동호(선비, 모용, 요 등)가 계승했다.

고조선은 진시왕의 진(秦)나라와도 관계가 있다. 삼국지에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까지 이르렀다. 당시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의 습격을 두려워해 진에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魏書 東夷傳 韓)” 는 기록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는 길다. 은나라의 유이민과 숙신, 북방의 맥·동호 등을 기반으로 형성돼 BC 7세기에는 발조선으로 춘주 5패국이나 전국 7웅국과 같은 제후국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엔 보다 독립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연나라와의 대치했고 연의 공격으로 국력의 소모가 있었으며 BC 3세기 말에는 진(秦)나라와 화평을 유지하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다. 강국 고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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