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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벤츠 ‘2세대 CLS’ 디자인한 젊은 한국인, 휴버트 이

중앙일보 2011.02.12 03:12 주말섹션 12면 지면보기
125년 전통의 자동차 회사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


“한국 입시교육 색깔 빼느라 길거리 미술 섭렵했다”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Best or Nothing)’는 벤츠 정신은 ‘별은 항상 위에서 빛난다’는 의미의 ‘세 꼭지 별(Three-pointed Star)’로 집약된다. 그 별을 더욱 빛나게 만든 게 의외로 30대 한국인이다. 9월 한국에서 출시될 2세대 CLS(2012년형)를 디자인한 자동차 디자이너 휴버트 이(37·이일환)씨 얘기다. 2004년 출시된 CLS는 세단처럼 도어가 네 개지만 쿠페 못지않은 날렵한 디자인으로 4도어 쿠페 유행을 몰고 온 자동차. 벤츠 독일 본사는 2006년 자사의 전체 디자이너에게 2세대 CLS 디자인을 공모했고, 이듬해 최종 결선에서 휴버트가 1등을 차지한 것이다. 벤츠 캘리포니아 디자인 본부에서 그를 만났다.



LA중앙일보=박상우 기자















●자동차 디자이너들의 세상이 궁금합니다.



 “1등만이 인정받는 치열한 곳입니다. 올림픽에선 금·은·동메달이 있지만 자동차 디자인 세계에선 오직 1등만의 작품이 선택되니까요. 자동차 디자이너들 가운데 20% 정도만이 하나라도 자신이 디자인한 차량이 거리에서 굴러다닌다고 보면 됩니다. 나머지 80%는 자신의 작품 없이 은퇴하게 되는 거죠.”



●입사 8년차에 본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지난해 4월, 캘리포니아 디자인 본부장 자리에 앉게 됐습니다. 동양인 최초에다 최연소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 세월이 흘러도 많은 이의 기억 속에 2세대 CLS를 디자인한 주인공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이 더 기쁩니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에겐 자신이 디자인한 차량이 거리에서 질주하는 걸 보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디자인 공모를 할 때 어땠습니까.



 “2006년 9월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1세대 CLS가 워낙 큰 인기를 얻은 터라 부담이 컸습니다. 차라리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더 쉬웠을 거예요. 저는 일단 과거에서 아이디어를 찾았습니다. 1930년대 벤츠의 모습을 토대로 새로운 CLS를 디자인한 거죠. 그 옛날엔 환경적인 요소와 안전수칙, 그리고 정부 규제도 없던 때라 오히려 디자인 측면에서 지금보다 예술적인 차가 많았거든요. 디자인 작업 때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을 잊지 않기 위해 늘 볼펜과 종이를 가지고 다닙니다.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아이디어가 생각나 휴지에 그렸던 적도 있습니다. 샤워할 때도 아이디어가 떠올라 뜨거운 물에 뿌옇게 흐려진 유리창에 손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요.”



●최종 선택까지 치열한 경쟁이 있었겠지요.



 “전 세계 벤츠 디자인 본부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50여 명 가운데 30명과 겨뤘습니다. 1차에서 28개 디자인이 선택됐고 3개 디자인이 최종 결선에 올랐죠. 2007년 1월, 독일 본사에서 회장을 비롯한 이사회 멤버들이 투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 작품이 최종 선택됐죠.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 될 만큼 기쁘더라고요.”



●자신의 디자인을 자랑한다면.



 “우아함과 세련됨, 그리고 역동적인 모습을 갖춘 차입니다. 1세대와 비교해 남성미가 더해졌다고 보면 됩니다. 옆 모습을 보면 표범이 땅을 박차고 뛰어나가기 전 움츠리고 있는 장면이 상상됩니다. 또 CLS는 벤츠 시리즈 가운데 니치(Niche·틈새) 상품에 해당되죠. 이 차를 보면서 벤츠 차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CLS는 E시리즈의 엔진과 트랜스미션 등 80%가 같지만 더 럭셔리하고 우아합니다. 가격도 훨씬 비싸죠. 사치스러운 면이 있는 거죠.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에게 뽐내기 위한 그런 고급차입니다.”



●실패의 쓴맛을 본 적은 없나요.



 “입사 이후 4년 동안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E클래스와 E클래스 쿠페 등 여러 디자인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번번이 물을 먹었어요.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디자이너였죠. 실패만 하다 보니 자신감도 떨어지더라고요. 하지만 ‘어떻게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나’ 하고 스스로 위안하며 계속 도전했죠. 이런 모습에 상사들이 제 가능성을 조금씩 인정해 주었고, 결국 CLS 디자인으로 결실을 맺은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실패가 오히려 약이 됐고, 겸손함을 덤으로 배우게 된 것 같아요.”



●CLS 외에 다른 작품이 있나요.



 “CLS 디자인 이후엔 모든 것이 술술 풀렸죠. 지난해 3월, 제네바 모터쇼에서 선보인 F800 컨셉트카가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 차세대 벤츠라고 보면 되는데요. 플러그인 방식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탑재해 최고 출력 400마력까지 가능합니다. 8개월의 디자인 작업 시간이 걸렸죠. 지난해 11월, LA 오토쇼 디자인 챌린지에서 화제가 됐던 바이오메(Biome) 컨셉트카 역시 제가 다른 디자이너들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이 차량은 바이오파이버라는 초경량 소재가 사용됐는데 금속보다 가볍지만 강철보다 강합니다. 두 컨셉트카의 오토쇼 출품부터 CLS 2세대 데뷔, 그리고 본부장 승진까지 이 모든 일이 2010년에 벌어졌죠. 제겐 정말 잊을 수 없는 한 해였습니다.”



●요즘 유명세를 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보다 벤츠가 탄생한 독일에서 이름이 제법 알려졌습니다. ‘당장 사고 싶다’는 칭찬부터 ‘실망스럽다’는 비판까지 수많은 의견을 듣습니다. 그럴 때면 마치 공인이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CLS 디자인의 주인공이 된 이후 회사에서도 전폭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광고도 찍고 동영상 촬영도 합니다. CLS를 설명하는 책자의 표지모델을 하기도 했고요. 9월 한국에서 열리는 CLS 론칭쇼에도 참석할 예정입니다.”



●회사에서 밀어주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벤츠는 그동안 성능 중심의 차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디자인 진화’를 선언하며 디자인 측면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입니다. LED 불빛을 사용했던 아우디의 나이트 디자인과 크리스 뱅글이 이끈 BMW의 디자인 혁명에 자극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지요. 이번 2세대 CLS는 벤츠 디자인의 진화를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이 차를 시작으로 디자인의 혁신은 계속될 것입니다. 제가 운이 좋게도 그 시발점이 된 거죠.”



●한국차들은 어떤가요.



 “불과 5년 전만 해도 자동차 디자이너들이 모여 타사 디자인을 말할 때 한국차는 거론되지 않았었습니다. 한마디로 논외였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도 현대와 기아차가 자주 거론될 만큼 비약적인 디자인 발전을 했습니다. 특히 기아자동차의 옵티마(K5)와 스포티지 디자인은 어디다 내놔도 손색없는 훌륭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 디자이너 꿈을 갖게 된 건 언제인가.



 “부모님이 말씀하시길 다섯 살 때부터 연필로 종이에 자동차를 그렸다고 합니다. 물론 그때는 박스 하나와 바퀴 두 개 그리는 것이 전부였지만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대학에서도 디자인 전공을 했습니다. 처음엔 동부지역 로드아일랜드 미대를 다녔고 이후 패서디나 아트센터로 옮겨 자동차 디자인 공부를 했습니다. 벤츠 캘리포니아 디자인 본부에는 2002년에 입사했고요. 당시 닛산·마쓰다·도요타 등 여러 회사와 인터뷰를 했는데 벤츠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학교 다닐 때 스페인 바르셀로나 폴크스바겐 스튜디오에서 인턴십을 한 경력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꿈을 잃지 않고 준비하는 사람에겐 반드시 기회가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저도 1998년, IMF 사태로 아버지 사업이 휘청거릴 때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도 전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만큼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자동차 그림을 그렸고, 다시 비상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죠. 절대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본부장으로서 하는 일은.



 “본부장 자리에 오르면서 제가 디자인 업무를 종합·총괄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의 컨셉트에서부터 마지막 랜더링(2차원 그림을 3차원 화상으로 만드는 과정)까지 제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취소도 가능하지요. 또 스튜디오의 경영도 맡고 있습니다.”



●향후 계획과 포부를 말해 주세요.



 “앞으로 캘리포니아 디자인 본부를 2000년대 초 스타 디자이너들로 가득했던 폴크스바겐 바르셀로나 스튜디오처럼 자동차 디자이너들의 ‘꿈의 스튜디오’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또 이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벤츠 시리즈의 디자인이 계속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j칵테일 >> 선배들이 부하직원으로



LA 남쪽으로 160㎞ 떨어진 칼즈배드시에 위치한 벤츠 캘리포니아 디자인 본부. 모토쇼에 출시하는 컨셉트카와 일반 판매되는 프로덕션카를 모두 디자인하는 ‘어드밴스트(Advanced)’ 디자인 본부다. 캘리포니아 외에 독일과 일본에 어드밴스트 디자인 본부가 있다. 건물 외곽 어디에도 엠블럼이 없다. 유리창도 온통 검은색이다. 안은 들여다볼 수 없다. 산업 스파이나 파파라치들을 피하기 위해서다. 언론 인터뷰도 독일 본사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까다롭다.



 이곳에서 20여 명의 디자이너와 근무하는 휴버트 이 본부장. 입사 8년 만에 본부장으로 승진하는 바람에 하늘 같던 선배들이 한순간에 부하직원이 돼버렸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지금은 괜찮다”고 그는 말한다. 모두가 이 본부장의 실력과 리더십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또 이 본부장 역시 선배들을 배려한다. 인터뷰 시작 전에도 혹시나 다른 디자이너들의 업무에 방해가 될까 취지를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나오는 길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무슨 차를 탈까 궁금했다. CLS를 디자인한 이 본부장의 차량은 ML350 SUV다. 그는 “이번 여름에 미국에서 CLS가 출시될 때 차를 바꿀 계획”이라고 말했다. 본부장급에게는 CLS, GL, E550, ML550 가운데서 고를 수 있다.



>> "닥치는 대로 보고 느꼈죠”



휴버트 이는 부친이 UCLA에서 유학할 때 태어났다. 그리고 초등학교까지 미국에서 다니다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대학 공부를 위해 다시 미국으로 갔는데 그때 엄청난 충격과 상실감에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한국의 입시교육에 젖어 있던 그로서는 기술적인 면에서는 뒤지지 않았지만 미국 학생들처럼 내면의 세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과제를 가지고 교수와 학생들이 서로 품평을 하는데 저의 그림엔 혼이 없이 껍데기만 그럴싸하다는 평을 받아야 했어요. 솔직히 제가 봐도 그랬죠. 다른 학생들은 이미 어렸을 적부터 개성을 살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표현하는 데 이미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 후 휴버트는 박물관에서부터 갤러리, 길거리 미술, 음악, 심지어 음식까지 닥치는 대로 보고 느끼려고 노력했다. 일단 시야를 넓히고 고정관념을 없애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저는 문화예술 경험, 틀에서 벗어나는 예술세계를 느끼면서 저도 모르게 진정한 예술을 즐기게 됐고 다른 학생들처럼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 가게 됐습니다. 오늘날 저를 만들어 준 밑거름이 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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