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숭례문의 밑바닥을 봐라!

중앙일보 2011.02.12 00:27 종합 34면 지면보기






정진홍
논설위원




#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이 불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국보 1호요, 우리의 얼굴이었던 숭례문은 어찌 되었을까? 늘 그 앞을 지나 다녔지만 가림막에 가려 있던 그 안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제 오전 궁금증과 기대를 함께 안고 숭례문 복원현장을 찾았다. 이날은 숭례문 참화 3주기를 맞아 문화재청이 복원공사 현장을 공개하고 전통방식 그대로의 복원 과정도 시연하는 행사를 펼쳤다.



 # 큰 돌 위에 먹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쐐기를 박아 바위 같은 원석을 쪼개고 정으로 일일이 표면을 다듬는 전통방식의 치석(治石)! 이렇게 다듬은 석재를 ‘이맛대’로 들어올려 축조를 한다. 강원도 삼척의 준경묘(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양무장군의 묘) 일대에서 베어와 문루의 주 기둥으로 쓸 요량인 금강소나무를 탕개톱으로 자르고 대자귀와 대패 등을 써 전통방식 그대로 치목(治木)하는 모습도 보인다. 또 전통제련법에 따라 얻은 괴련철을 모루 위에 놓고 망치로 두드려 목재를 고정하는 데 쓸 머리 없는 못인 ‘무두정(無頭釘)’ 등 철물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 이처럼 주변이 전통방식의 복원 과정을 시연하느라 시끌벅적할 때 정작 화마를 겪어 육축(陸築)만 덩그러니 남은 숭례문은 그런 분주함을 애써 외면하듯 말없이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육축이란 성문을 달고 그 위에 문루(門樓)를 떠받치기 위해 큰 돌들로 축조한 기초 성체를 말한다. 족히 600년 넘게 그 자리를 버텨왔을 육축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를 손으로 쓰다듬듯 더듬어봤다. 곳곳에 불에 그을린 자국은 물론 총탄에 파인 흔적도 역력했다. 그만큼 숭례문의 육축은 600년 세월의 온갖 풍파와 참화 속에서도 견뎌온 것이다. 손으로 더듬어본 숭례문의 육축은 여전히 매서운 겨울 날씨 속에 찬 기운을 내뿜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이내 그 육축이 전하는 까닭 모를 따뜻한 기운이 내 손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비록 덩그러니 남은 육축뿐이었지만 숭례문은 거기 그렇게 놀라운 생명력으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 숭례문 복원 현장을 둘러보다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육축 가운데의 무지개 모양 통로인 홍예(虹霓) 앞 양쪽을 약 1.6m 깊이로 파놓은 것이었다. 조선 초기 숭례문 창건 당시의 지반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의 1.6m 아래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화마가 덮치고 간 숭례문을 다시 복원하기에 앞서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이미 육축 주변 800㎡를 파헤쳐 현재 지표면의 1.6m 아래에서 숭례문 창건 당시 바닥에 깐 육축 기초 지대석과 홍예의 대문이 열리고 닫히도록 문짝의 문설주를 꽂아 지지하는 바닥돌인 문지도리석을 발굴한 바 있다. 아울러 그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육축석재 1~2단을 다시 발굴해 숭례문의 본래 높이가 3년 전 화재 당시의 6.4m가 아니라 창건 당시엔 8m임을 밝혀냈다. 600여 년의 세월 속에서 자연스레 흙이 쌓이기도 하고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을 겪으면서, 또 일제가 새로 길을 내는 과정 등에서 1.6m가 높아진 것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흙의 퇴적이 아니라 우리의 본바탕마저 잊게 만든 부끄러운 내면의 퇴적이었다.



 # 그렇다. 화마를 겪고 육축만 남은 채 그 바닥까지 파헤쳐져 벌거벗은 숭례문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그라운드 제로’다. 내년 말이면 숭례문은 다시 예전의 의젓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멋지게 복원될 숭례문의 외양만이 아니라 그 숭례문이 600여 년 전 세워진 본래의 밑바닥을 잊지 말고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 왜냐고? 그 바닥에 우리의 얼굴이자 국보 1호인 숭례문의 초심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자고로 바닥을 치면 강해진다. 그 바닥으로 내려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출발할 일이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숭례문을 외적 형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 진정성으로 우리 안에 복원하는 마음의 자세이리라.



정진홍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