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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춘천은 리코더 메카다 … 이 남자 조진희가 씨를 뿌렸다

중앙일보 2011.02.12 00:08 종합 27면 지면보기



“리코더 배우러 오스트리아 가겠다니
그때는 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제 한국 전문연주자 90%가 제자죠”



털보 리코더리스트 조진희씨. 수염은 교통사고 상처를 가리기 위해 길렀다. 강원도 춘천에서 리코더 하나를 붙들고 있는 ‘리코더 대부’와 잘 어울린다. [변선구 기자]



아내와 아들 있는 가장이 “리코더 공부하겠다”며 유럽에 간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것도 사범대를 나와 번듯한 학교를 잡아놓은 상황에서 말이다. “밥 벌어 먹긴 글렀다” “제 정신 아니다” 정도 아닐까. 조진희(50)씨가 1989년에 숱하게 들었던 말이다. “초등학생이나 부는 악기, 왜 없는 살림 쪼개 공부하느냐”는 거였다. 그는 모르쇠로 일을 벌였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났다.



 조씨는 한국의 리코더 유학생 1호. 고향은 춘천이고 11남매 중 막내다. 여섯 살에 우연히, 운명적으로 리코더 소리를 듣는다. “집안에 풍금·기타 등등 별별 악기가 다 있었어요. 그런데 여덟째 형님이 분 리코더 소리를 잊을 수 없었어요. 사람 숨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악기였죠. 그 순수음을 꼭 제대로 내보고 싶었죠.”



 악기 한 자루 들고 찾아간 빈 국립음대. “리코더 LP음반이 하나 있었는데 그 학교 교수라는 거에요. 이름 하나 들고 무작정 방에 찾아갔죠.” 또 운명의 장난? 정작 그가 들어간 곳은 그 교수 옆방이었다. 이렇게 ‘잘못’ 만난 교수가 헬무트 샬러. 20년 넘게 리코더를 독학했던 조씨는 “한달 줄 테니 연습해서 다시 오라”는 ‘임시입학증’을 받았다. 이어진 지옥훈련. 결국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리코더는 18세기까지 서양악기 중의 악기였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하이든 직전의 고전 초기까지, 수많은 리코더 작품이 남아있다. 궁정과 실내가 주요 무대였던 만큼, 작고 소박한 리코더의 음색이 빛을 발했다. 19세기 이후 공연장이 커지고 자극적 음향이 유행하면서 리코더는 ‘프로’들의 손에서 멀어졌다. 조씨는 “리코더가 잘 대접받는 악기였기 때문에 시대변화에 맞게 변신해야 할 절박함이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게다가 한국·일본에선 리코더는 교육용 악기로만 이해됐다.



 94년 귀국했을 때도 시선은 차가웠다. “오스트리아에선 음악에 빠져 좋았지만, 귀국 후 몇 년은 다시 컴컴했다”고 했다. 바로크와 그 전 시대를 복원해 연주하는 ‘고(古)음악’ 열풍이 불기 시작하던 90년대 후반에야 조금 숨통이 트였다. 2002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기악과에 리코더 전공이 생기며 활개를 펼 수 있었다. 한국의 리코더 전문 연주자는 줄잡아 40여 명. 90% 이상이 조씨 제자다.



 조씨는 노모(老母)를 모시느라 고향 춘천을 지키고 있다. 덕분에 춘천은 가히 리코더의 ‘메카’가 됐다. 한때 한예종 리코더 응시생 절반 이상이 춘천 출신이었다. 또 90년대 후반 이후 매년 춘천에선 고음악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그가 96년 창단한 ‘춘천 청소년 리코더 합주단’ 단원만 90여 명이다. 음역별 9종류 리코더로 구성된 한국 초유의 리코더 오케스트라다.



 그는 2004년 아예 ‘리코더 공방’을 차렸다. 일종의 수입악기 대체효과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40여 년 전 처음 들은 꾸밈없는 소리가 아직도 떠오르는 듯. “음대에 리코더 전공이 늘어나면 좋겠어요. 리코더의 순수한 음색을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조씨는 13일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리조트 내 콘서트홀에서 ‘원전악기로 듣는 바로크 음악’ 공연을 연다. 리코더리스트들이 모인 합주단 ‘블록플뢰텐 서울’과 함께한다.



글=김호정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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