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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역사적 기억상실증

중앙일보 2011.02.11 00:18 종합 31면 지면보기








6·25전쟁이 끝나고 서울 남대문시장에는 속칭 ‘도깨비시장’이 생겼다. ‘미제(美製)’를 몰래 팔았다. 주로 미군 부대 또는 미국 구호물자에서 불법으로 흘러나온 물건들이었다. 변변한 국산(國産)이 없던 터라 부유층에게 꽤 인기였다. 단속반이 뜨고 지는 데 따라 미제는 도깨비처럼 진열대에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한국전쟁 직후는 ‘미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시절이었다. 미제란 단어는 요즘말로 ‘명품’의 동의어로 통했다. 도깨비시장에는 화장품·약·통조림·잡화·전자제품·주방기구·내복에 이쑤시개까지 ‘없는 게 없는’ 곳이었다. 하도 신기한 물건이 많아 ‘허깨비시장’이란 말도 나왔다. ‘부정 외래품의 온상’으로 찍혀 일시 폐쇄된 적도 있지만 남대문시장에만 1200여 곳의 도깨비 점포가 한때 성행했다. 1983년 수입 자유화 조치가 본격 추진되면서 쇠퇴했다. 지금은 ‘도깨비수입상가’로 변신해 맥을 잇고 있다.



 도깨비시장은 미국을 자유와 풍요의 상징으로 비춰준 시대의 창(窓)이었다. 미국에 대한 동경을 자극해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고 다짐하게 했다. 교육열도 이때 타오르기 시작했다. ‘못 입고 못 먹어도 자식만은 학교에 보내 출세시킨다’ ‘논 팔고 소 팔아도 학비는 댄다’고 했다.



 미국의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이 회고록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Known and Unknown)』에서 “미군의 (6·25) 참전으로 자유와 경제적 성공을 일군 한국의 ‘역사적 기억상실증(historical amnesia)’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북한 수용소에 갇혀 있지 않은 것은 많은 미국 청년들이 50년의 ‘잊혀진 전쟁’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그의 말처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쟁의 폐허를 딛고 우리의 오늘이 있기까지 미국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망각(忘却)의 동물이다. 독일의 심리학자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보고 배운 것을 한 시간이 지나면 절반 정도, 한 달 후에는 80%가량 잊어버린다. 20% 정도만 뇌의 한 구석에 희미하게 남는다. 이 20%의 과거 경험을 거울로 삼을 때 역사적 진보는 이뤄진다. 기억할 건 기억해야 한다. 미제를 우습게 아는 세상이 됐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미제라면 사족을 못쓰던 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럼즈펠드의 말에 가슴이 뜨끔하다.



고대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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