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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한국 파생금융상품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중앙일보 2011.02.09 00:11 경제 8면 지면보기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노인으로 태어나 나이가 들수록 젊어지는 벤저민의 일생을 그린 영화다. 태어날 땐 노인 모습이었고 죽을 땐 아기 모습이었다. 시간이 거꾸로 가니 벤저민의 생애는 늘 불편하고 외로웠다. 어렸을 땐 애늙은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자신은 자꾸 젊어지는데 애인은 늙어가니 결혼할 수도 없었다.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 자식보다 젊어져 가는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번뜩였지만 사실은 어둡고 슬픈 영화로 기억된다.



 최근 한국의 파생상품 시장을 볼 때마다 이 영화가 떠오르곤 한다. “한국 파생상품 시장의 시간도 거꾸로 간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파생상품도 사람처럼 태어나고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마침내 사라진다. 대개는 투자은행에 의해 처음 맞춤형 장외 파생상품이 탄생한다. 시장에서 인기를 끌게 되면 반복적으로 활용되고 성장한다. 다수의 거래자가 익숙해지면 유동성이 생기고 마침내 표준화된 장내 파생상품이 된다. 장외 스와프에서 시작해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 상장된 금리스와프 선물과 옵션, 유럽파생거래소(EUREX)에 상장된 신용부도스와프(CDS) 선물이 대표적 예다. 바로 이것이 제대로 가는 파생상품 시계다.



 국제기구들이 장외 파생상품 개혁을 논의하고 있다. 핵심은 장외 파생상품 표준화와 중앙청산소를 통한 집중거래다. 미국엔 맞는 주장이다. 장외 파생상품이 과용·오용됐고, 시스템 위험까지 유발했으니 표준화와 중앙청산을 논하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은 어떠한가. 사정이 다르다. 장외 파생시장이 아직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런 국가에 표준화와 단순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마치 파생상품 시장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다. 갈수록 젊어지는 벤저민처럼 먼저 표준화된 상품에서 시작해 맞춤형 상품으로 가자는 것과 같다. 과연 가능할까. 청년기부터 표준화 상품에 익숙해진 사람이 중년이 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장외 파생시장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표준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시장혁신이 위축된다. 혁신정신이 고갈되면 금융시장은 결코 발전할 수 없다.



 중앙청산소, 물론 도입해야 한다. 시장의 시스템 위험을 줄이고 투명성을 개선하는 데 크게 공헌할 것이다. 다만 한국 시장에 맞게 도입해야 한다. 우리 금융사들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바젤은행감독위원회는 은행들의 중앙청산소 활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적격 중앙청산소 기준을 먼저 정하고 이들과 거래하면 자본적립 요건을 대폭 완화할 방침이란다. 역으로 금융사가 장외거래를 하거나 비적격 청산소와 거래를 하면 자본적립 요건을 대폭 강화한다고 한다. 문제의 심각성이 여기에 있다. 한국의 중앙청산소가 적격 청산소로 인정받지 못하면 거래하는 한국 금융사들이 불이익을 보게 된다. 자본비용이 높아지고 국제경쟁력이 떨어진다. 그러니 국제기구가 정한 기준에 맞는 청산소를 만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자본금 요건, 상품의 범위 등 적격 요건이 우리 상황에 맞지 않는 경우다. 조건이 너무 높으면 중앙청산소도 과다투자를 해야 하고 수익성을 맞추기도 힘들다. 멀쩡하게 만들기는 했으되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지방공항과 다를 바 없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가장 효과적 방법은 각국의 장외 파생시장 발전 정도를 고려해 적격 청산소 기준을 달리 정하는 것이다. 한국의 적격 청산소는 미국의 적격 청산소보다 훨씬 완화된 기준을 적용받는 게 마땅하다. 한국의 장외 파생시장은 이제 막 성장판이 열렸다. 너무 관절을 많이 써 관절염 약이 필요한 미국과는 사정이 다르다. 단백질 공급이 필요한 성장기 청소년에게 관절염 약을 처방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파생상품도 성장기를 거쳐 중년으로 가야지 그 반대가 되면 벤저민처럼 평생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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