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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가난한 청춘의 양주, 이젠 외국인 선원·이주 노동자의 술

중앙선데이 2011.02.06 06:45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추억의 술 캡틴큐

명절 대목은 ‘술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명절의 인기 선물이 술이다. 요즘엔 전통주부터 2700만원 하는 최고가 위스키까지 다양한 종류와 가격대의주류세트가 있지만 30년 전엔 이 술이 대세였다. 술을 만드는 롯데칠성(1986년 롯데주조를 흡수합병)의 사사(社史)는‘음력 설날을 앞둔 1월 29일에는 선물세트 제품의 확보를 위해 대리점에서 선수금을 가져오는 일까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80년 1월 출시되자마자 바람을 일으킨 이 술은, 그 시절 양주의 대명사였다.















추억의 술, 캡틴큐 얘기다. 롯데주조가 저가 대중양주로 선보인 국내 최초의 럼(Rum)이다. ‘물 건너온 술’이면 주종 구분 없이 양주로 뭉뚱그려지던 때 귀하고 비싸서 못 먹던 양주의 로망을 이뤄준 술이다.



국내에서 ‘진짜’ 양주가 생산되기 시작한 건 불과 20여 년 전. 위스키 원액 100%인 특급 위스키가 처음 나온 게 84년이었다. 그 이전의 국내 양주 시장은 캡틴큐와 같은 ‘기타재제주’가 차지하고 있었다. 90년까지 주세법은 술의 종류를 탁주·양주·청주·맥주·과실주·소주·위스키 등과 기타재제주(其他再製酒)로 나눴다. 기타재제주는 원액 함량이 20% 미만이거나 양조주나 증류주를 원료로 알코올·당분·향료 등을 혼합해 빚은 술을 말한다.



‘주정에 럼향을 절묘하게 혼합하여 만든 제품’(롯데칠성 홈페이지)인 캡틴큐도 기타재제주였다.



78년 롯데주조가 팽창하는 양주 시장을 잡기 위해 내놓은 신제품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롯데칠성 사사는 ‘캡틴큐 출고실적이 80년 출시 5개월 만에 경쟁회사들의 위스키 및 기타재제주 총 출고실적을 넘어서 국내 양주시장을 석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해 1000만 병이 넘는 캡틴큐가 불티나게 팔렸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하야비치’와 ‘조우커’는 진작에 단종됐다. ‘무늬만 양주’인 기타재제주는 일반증류주로 바뀌었다. 캡틴큐만 일반증류주로 살아남았다. 생산량도 매년 16만L가 넘는다. 40~50대에게 캡틴큐는 코를 찌르는 향과 지독한 두통·숙취로 기억되는 술이다. 싸구려 맛이다. 그래도 멋은 있었다. 수학여행에서 몰래 마신 자유로, 가난한 청춘을 위한 인생 첫 양주로도 이 술은 기억된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도 캡틴큐가 등장한다. 20대인 원상(박해일)과 40대인 윤식(문성근)이 함께 캡틴큐를 마시는 장면이다. 원상에게는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처음 사 마신 양주’였다. 윤식에겐 대학시절을 함께 했을 술이다. 윤식은 이런 말을 한다. “이 싸구려 술, 자꾸 먹게 된단 말야. 근데 괜찮아.”











30년을 이어온 ‘추억의 술’은 대표상품이 될 법도 한데 오히려 롯데칠성은 골치가 아프다. 캡틴큐가 가짜 양주의 원료로 사용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생산 중인 술을 왜 시중에서 볼 수 없는지 수상하다는 의혹에서 비롯된 소문이다.



실제 지난해 5월 대구에서 캡틴큐를 원료 삼아 17억원 상당의 가짜 양주 8600병을 만들어 유통시킨 일당이 적발됐다. 이들은 캡틴큐에 물을 타고 식품첨가용 에탄올인 프레타놀A를 섞었다. 캡틴큐(알코올 35%)와 물로 희석된 가짜 양주의 알코올 도수를 40%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단맛을 더하는 벌꿀과 황금빛을 내기 위한 색소도 더해졌다.



연례행사처럼 이런 사례가 적발되니 롯데칠성 측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매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가짜 양주에 얽히니 회사 이미지에도 좋지 않다. 뉴스에 나오는 자체가 별로다”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캡틴큐가 이런 오해를 받는 게 억울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가짜 양주 판별 및 주요 성분 분석을 하는 국세청 주류면허지원센터 분석감정과의 김형식 과장은 “가짜 양주를 만들 때 캡틴큐만 사용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싸구려 주종이 이용된다”며 “더구나 최근엔 먹다 남은 양주를 섞는 사례가 더 많다”고 말했다. 주류면허지원센터에 지난해 들어온 170여 건의 가짜 양주 분석 의뢰건 대부분도 술집에서 남은 술을 섞어 만든 걸로 밝혀졌다. “색소 등 기타 원료를 첨가해야 ‘진짜’ 가짜 양주가 되는 것”이라는 엄밀한 구분에 따르면 가짜 양주보다는 가짜 제품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는 설명이다.



음용(飮用) 외에 캡틴큐가 소비되는 곳이 있다. 과자나 빵을 만들 때다. 제빵의 반죽 단계에서는 달걀 비린내 같은 잡냄새를 없애기 위해 럼이 첨가되는데 수입 럼 대신 값싸고 구하기 쉬운 캡틴큐가 이용된다는 것이다.



2009년 캡틴큐는 16만2000L가 생산됐다. 700mL 용량으로 23만 병이 조금 넘는다. 잘나가던 시절에 비할 바 아니지만 수요는 꾸준하다. 애꾸눈 해적선장이 그려진 라벨 위의 ‘캪틴큐’라는 옛날식 외래어 표기법도 그대로다. 출시 당시 3000원이던 700mL한 병의 출고가는 4290원이 됐다. 한국주류산업협회에 따르면 캡틴큐는 2006년 17만9000L, 2007년 21만7000L, 2008년 16만1000L, 2009년 16만2000L가 생산됐다. 출고가에서 72%의 주세(酒稅), 주세의 30%가 붙는 교육세와 부가세 10%를 제한 캡틴큐 700mL 한 병의 원가는 약 2014원. 이를 기준으로 한 2009년 캡틴큐의 매출은 약 4억7000만원이다. 1조2000억원이 넘는 롯데칠성 연매출의 0.05%에도 못 미친다. 그래서 캡틴큐는 더부살이 중이다. 상시 생산하지 않고 부평공장의 스카치블루 라인에서 주문이 있을 때마다 만들어진다.



유통업체들도 전국의 매장에 갖춰놓지는 않는다. GS25는 전국 5000여 개 매장 중 50여 곳에서만 캡틴큐를 판매한다. 판매 가능성이 있는 매장에서만 주문하는 타깃마케팅 제품이다. GS25 홍보실 김시재씨는 “술의 품질이 높아지고 구매력이 커지면서 내국인 가운데 캡틴큐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캡틴큐를 마시는 사람은 따로 있다. 독주를 찾는 외국인 선원과 주머니가 얇은 이주 노동자들이다. 판매 1위 지역도 700mL짜리는 부산, 360mL짜리는 천안이다. 특히 부산 감천항 옆 매장에선 GS25에서 전체 캡틴큐 판매량의 50%가 팔린다. 700mL 전체 판매량의 81%가 이곳에서 나간다. “배에 싣고 다니면서 마실 술을 찾는 선원들은 큰 병을,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 번에 마시기에 부담 없는 작은 병을 선호한다”는 설명이다. 이마트는 2008~2009년에 팔지 않다가 2010년 판매 목록에 추가했다. 지난해 매출이 약 3300만원이었다. 롯데마트는 전국 90여 개 매장 중 63곳에서 판매 중인데 역시 부산에서 두드러진다. 부산시 북구 화명점은 2008년 대비 2009년 판매량이 33% 증가했다.



그 시절 캡틴큐와 쌍벽을 이루던 라이벌도 여전히 나온다. 국순당L&B의 ‘나폴레온’이 대표적이다. 백화·진로·롯데와 함께 70년대 말 국산양주 시장 4파전을 이끌던 해태주조가 76년 선보였다.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 계열의 기타재제주였다. 해태그룹이 문을 닫으면서 회사가 2003년 국순당에 인수되고도 술의 명맥은 이어졌다. 2009년엔 업그레이드된 ‘나폴레온 로얄’이 나왔다. 브랜디 함량을 이전의 19%에서 20.5%로 높이고 진짜 브랜디가 됐다. 2003년 24억원이 넘는 매출은 3분의 1로 줄었지만 저가 양주를 찾는 꾸준한 수요에 따라 출시 이래 한 번의 중단 없이 생산되고 있다. 



홍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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