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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가 창조한 신맛에 눈길 쏠려...3D 기술 접목한 신개념 요리도 등장

중앙선데이 2011.02.06 00:58 204호 2면 지면보기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음식축제 ‘서울 고메(Seoul Gourmet) 2010’을 진행하며 행사에 참석한 해외 요리사와 미디어들로부터 자주 비교됐던 행사가 있다. 바로 ‘마드리드 퓨전(Madrid Fusion)’이다. 국제음식회담(International Gastronomic Summit)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행사는 세계 최정상의 요리사들과 업계의 영향력 있는 미디어, 관련 업계 CEO 등이 모여 현재 요리계의 트렌드와 미래를 전망하는 콘퍼런스 겸 박람회다. 2002년 호세 카를로스 카펠(Jose Carlos Capel)이 처음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전 세계 수많은 음식 관련 행사 중 가장 화제가 되는 행사인 동시에 모두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세계 요리계의 트렌드를 주도해 왔다. 10년 전만 해도 프랑스나 이탈리아 요리에 가려져 있던 스페인 요리가 혁신적이고 흥미로운 요리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다 마드리드 퓨전 덕이라고 할 정도니, 행사의 입지를 짐작할 만하다.

1월 25~27일 열린 세계 최고 음식 축제 ‘마드리드 퓨전’ 현지 르포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간 9회째로 열린 올해 마드리드 퓨전도 열기는 뜨거웠다. 그 유명한 레스토랑 엘 부이(El Bulli)의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a)를 비롯해 세계 순위 5위 레스토랑 무가리츠(Mugaritz)의 안도니 루이 아두리스(Andoni Luis Aduriz), 스페인의 후안 마리 아르사크(Juan Mari Arzak)과 엘레나 아르사크(Ellena Arzak) 부녀, 멕시코의 마르타 오르티스(Martha Ortiz), 벨기에의 크리스토프 코펜(Kristof Coppens)….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거나 혁신적인 요리사들이 저마다의 주제와 메뉴를 들고 무대에 섰다.

문 닫은 ‘엘 부이’ 예약 대기 300만 명
단순히 볶고 굽고 끓여내는 요리 시연이 아니라 식재료와 조리방법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와 새로운 시도, 그리고 요리의 철학을 논하는 소통의 장으로 기능한 마드리드 퓨전 자체의 미덕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마드리드 퓨전이 오늘의 명성을 가지게 되기까지 8할이 페란 아드리아 덕이라는 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세계적인 권위가 있는 영국 ‘레스토랑 매거진’의 레스토랑 순위에서 수년간 세계 1위를 차지해온 화제의 레스토랑 ‘엘 부이'의 수장, 달리와 피카소에 비유되는 창의적인 요리 실력뿐 아니라 스티브 잡스를 연상시키는 언변과 무대 매너까지 갖춘 절대미각의 소유자. 뉴욕 타임스·르몽드·엘파이스 등 세계 유력 매체들이 앞다투어 세계 최고라 선정한 이 스타 요리사는 한 해도 빼지 않고 마드리드 퓨전의 무대에 올랐다. 급기야는 수개월씩 예약이 밀려 있다는, 세계 식도락가들의 성지와도 같은 자신의 레스토랑 엘 부이를 당분간 닫겠노라고 지난해 마드리드 퓨전에서 공표해 그야말로 핵폭탄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런 판이니, 올해 마드리드를 찾은 각국 요리사와 미디어의 최대 관심사 역시 아드리아의 다음 행보, 말하자면 엘 부이의 운명이었을밖에.

그의 세션을 앞두고 오디토리움을 가득 채운 인파는 아드리아의 영향력을 실감케 했다.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기자와 카메라들로 무대 주변은 북새통이었다. 기대와 떨림을 담은 삼삼오오의 웅성거림은 긴장감마저 감돌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예의 그 능수능란한 제스처로 무대에 오른 아드리아는 또 한번 업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계획을 공개했다.

엘 부이 레스토랑의 재개점을 기다리는 식도락가들의 열망을 뒤로 하고(1년간 문을 닫은 엘 부이의 예약 리스트는 오히려 300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엘 부이의 역사와 1800여 개에 이르는 메뉴 레시피를 열람할 수 있는 데이터센터, 관련 분야 워크숍과 상시적인 브레인스토밍을 위한 아이디어센터 등을 갖춘 ‘엘 부이 재단(El Bulli Foundation)’의 설립을 공표한 것. 1년에 6개월은 레스토랑 문을 닫고 메뉴 개발과 연구에 몰두해온 아드리아다운 결정이었다. 아드리아는 “난 줄곧 운이 좋은 요리사였고, 이제 무언가 되돌려 줄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며 포부를 밝혔다.

그를 오래 알고 지낸 한 저널리스트는 “아드리아는 끊임없이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 내야 하는 부담과 과도한 노동시간에 지친 것”이라며 안타까워했지만, 이유야 어찌됐건 세계 제일의 레스토랑에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요리정보센터로, 엘 부이의 대변혁은 이미 시작된 듯 보인다. 2014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되는 이 초유의 프로젝트를 위해 요리사들과 건축가·엔지니어·기자·예술가 등으로 구성된 15명의 팀이 꾸려졌다. 산호를 모티브로 하는 친환경적 건축물의 디자인과 설계도 이미 나왔다. 이 모든 과정은 이미 데이터화되기 시작한 엘 부이의 1800여 개 메뉴 레시피와 함께 온라인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21세기 미식 트렌드와 한식 세계화
수비드(Sous-vide·진공저온요리)와 액화 질소를 활용한 급속 냉동기법 등을 활용하며 진화하고 있는 현재의 요리 경향은 요리사와 과학자 간의 경계를 허무는 듯 보인다. 실험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비커와 스포이트, 각종 약품들이 주방 한 쪽을 차지하고 요리사들은 식자재의 성분을 분석하거나 조리를 위한 최적의 온도를 알아내기 위해 화학자 못지않은 연구와 실험의 과정을 불사한다.

이렇듯 과학적 분석과 조리기술을 통해 기발한 맛과 향, 새로운 식감을 개발해 내고 있는 21세기의 요리계가 추구하고 있는 바를 뜻하는 단어가 바로 ‘테크노-이모셔널(techno-emotional)’, 우리말로 치면 기술을 결합한 감성 요리 정도가 되겠다.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접목시킴으로써 미각이나 후각·시각뿐 아니라 촉각이나 청각까지 만족시킴으로써 식사를 오감체험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서른 가지에 이르는 코스를 통해 보고 만지고 냄새 맡는 메뉴를 선보여 온 페란 아드리아가 바로 이 테크노-이모셔널 요리의 창시자이자 대표로 여겨진다.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조리기구를 즐비하게 갖춘 올해 마드리드 퓨전의 무대 위에서도 기술(technology), 감성(emotion), 쌍방향 소통(interactive), 변화(change) 같은 단어들이 빈번히 강조되고 시연됐다. 테크노-이모셔널하게 요리된 치킨 바비큐나 와플, 푸아그라(foie gras·거위 간)는 본연의 정수는 유지하면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요리가 아닌 전혀 새로운 형태나 맛으로 재탄생했다. 영상과 음향이 가동되거나 식사 중 행동에 따라 색깔이나 무늬를 바꾸는 쌍방향적 콘셉트의 식기가 등장했다. 3D(3차원)기술을 접목한 요리가 3D안경과 함께 접시에 올랐다.

현대 과학기술의 진보를 십분 활용해 요리의 진화를 꾀하는 테크노-이모셔널이 21세기 요리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친환경적 식재료, 건강하고 자연적인 조리 방식 등을 강조하는, 이른바 지속 가능형(sustainable) 요리라 할 것이다. 푸드 페어링(food pairing), 즉 ‘음식궁합’에 대한 강연을 진행한 과학자 베르나르 라후스(Bernard Lahousse)는 푸드 페어링에 있어 현재의 트렌드를 여섯 가지로 정리해 발표했다. 바로 지역에서 생산 유통된 식자재, 야채, 절이기(pickling), 수비드, 초음파 조리, 엔자임을 활용한 새로운 텍스처의 개발 등이다.

이 중 한국 사람으로서 특히 눈에 들어온 항목이 바로 야채와 피클링이었다. 전채에서나 사용되던 야채는 메인 디시뿐 아니라 디저트로도 조리될 정도로 중요한 식자재가 됐다. 야채를 먹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인 피클링 역시 자연 발효 과정을 통해 맛과 풍미가 높아질 뿐 아니라 건강에도 유익하다는 점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조리법이 됐다. 지난해 세계 1위를 차지한 덴마크의 레스토랑 ‘노마’나 뉴욕의 ‘모모후쿠’ 등이 피클링 조리법을 애용하기로 유명하다.

사실 세계 요리계가 발효를 통한 신맛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난해 마드리드 퓨전에서도 ‘산미의 유행(Acidity as a trend)’이라는 제목으로 음식에서 신맛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이미 논의된 바 있다. 지난해 열렸던 서울 고메 2010의 주제를 발효로 잡았던 것 역시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김치·나물 등 야채류 메뉴가 풍부하고, 발효를 기반으로 하는 음식이 주를 이루는 한국 음식의 세계화를 낙관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마침 행사 중 인사를 나누게 된 마드리드 퓨전의 설립자 호세 카를로스 카펠 대표는 내년 행사에 한국 요리사들을 초청하고 싶다며 적극적으로 서울 방문을 상의 해왔다. 마드리드 퓨전의 무대에서 한국의 요리사들이 세계의 스타 요리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그야말로 코앞인 모양이다. 더불어 세계 최고의 요리사들과 미디어들이 한식을 알고 연구하기 위해 앞다투어 서울행 비행기에 오를 날도 머지않기를 고대해본다.

사진 마드리드 퓨전 조직위원회 제공



이혜진씨는 미슐랭 스타 셰프들과 해외 유력 미디어 등이 참가한 음식축제 ‘서울 고메 2010’ 행사를 총괄했다. 한식이 세계회 되는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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