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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기자의 현장] 제2 라응찬 안 되려는 김승유 카드 성공하면 정·관계 낙하산도 막는다

중앙일보 2011.01.26 00:15 경제 2면 지면보기






김광기
경제선임기자




라응찬(73)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3연임을 끝으로 2009년 3월 깨끗이 물러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금융계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원로로 후배 금융인들의 멘토 요청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경영권 다툼을 벌인 뒤 떠밀려 사퇴한 그의 뒷모습은 쓸쓸하기만 하다.



 라 회장이 지주회장 4연임에 들어갔을 때 나이는 71세였다.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선진국 금융회사에선 꿈도 꾸기 힘든 일이었다. 회사 내부 규정으로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이사회 멤버의 연령을 70세 이하로 못 박은 곳이 많기 때문이다. 대체로 미국 은행은 72세, 캐나다 은행은 70세로 이사회 멤버 연령을 제한하고 있다.



 실제 운영을 들여다보면 CEO 연령은 훨씬 젊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의 CEO인 브라이언 모이니핸의 올해 나이는 52세다. 미국 금융회사의 CEO들은 50대 초에 취임해 정열적으로 일하고 60대로 들어서면 대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자기가 몸담았던 회사나 다른 금융회사 등의 사외이사를 맡는다. 그러다 70~72세가 되면 이사회 멤버의 연령 제한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은퇴해 노년의 생활을 즐긴다.











 나이 제한도 차별이라면 차별인데 선진국 금융회사들이 이런 전통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금융연구원 이병윤 연구위원은 “아무래도 70세를 넘기면 체력이 떨어지고 판단력도 흐려져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문제가 있다는 공감대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선진국 금융회사나 기업의 사외이사 자리는 은퇴에 앞서 마지막으로 기업과 시장을 위해 봉사하는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 기업의 경영진으로 충분한 권한과 보수를 누린 뒤 이사회 멤버인 사외이사로 들어가 소액 주주 등 광범한 이해관계자들의 대변자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때 보수는 그들의 과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보잘것없다. 하지만 자신의 역량을 사회에 환원하는 자세로 경영진을 견제하는 독립적 역할을 수행한다.



 미국 금융회사의 사외이사 진용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전직 CEO들이 다 모여 있다. BoA의 경우 윌리엄 브로드먼 전 비자인터내셔널 회장, 로버트 스컬리 전 모건스탠리 회장, 버기스 콜버트 밀러쿠어스 고문, 도널드 포얼 전 연방예금보험공사 회장 같은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대학교수나 연구소 학자, 관료, 정치권 인물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 이사회 멤버의 핵심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차기 CEO를 육성하는 일이다. 미국 주요 기업의 이사회는 ‘지배구조 모범규준’에 CEO 승계계획(succession planning)을 명문화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상시적으로 CEO 승계자 풀을 구성해 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며 성장해 나가도록 유도한다. 이를 통해 일정한 직위와 나이에 도달하면 회사 안팎에서 다음 CEO가 누구인지 투명하게 예측할 수 있도록 한다. 이사회 멤버들은 예비 승계자들에게 꾸준히 과제를 주고 소통하고 그 결과를 엄정히 평가한다. <그래픽 참조>



 한국 금융회사들의 현실은 어떤가. CEO 승계 프로그램이란 게 아예 없다. 일단 CEO가 되면 자기 사람 중심으로 이사회를 구성해 독주체제를 갖춘다. CEO의 전횡을 견제할 독립적 사외이사란 찾아보기 힘들다. 현직 CEO는 후계자를 키우긴커녕 될성부른 차기 CEO감이 나타나면 싹을 잘라버리기 일쑤다. 그게 지나쳐 제 발등을 찍은 게 지난해의 KB 사태요, 신한지주 사태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틈에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해 보겠다고 덤비는 정치권 실세와 관료들의 행태다. 한국 금융 경쟁력의 고질적 낙후성이 다 여기서 비롯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금융그룹 김승유 회장이 이런 관행을 끊어 보겠다고 도전장을 냈다. 자율적으로 CEO 나이를 70세로 제한하고 후계자 육성 프로그램도 확실히 갖추겠다는 구상이다. <중앙일보 1월 25일자 E1면>



 이런 구상의 배경이 뭘까. 금융계 원로로서 모범적 사례를 남기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법하다. 물론 속내는 나도 실패한 CEO로 남을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담겼을 것이다. 항간에선 ‘3연임을 위한 승부수’란 관측도 나온다. 김 회장 또한 아직 이렇다 할 후계자를 키워놓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몇몇 관료 출신자가 하나금융 회장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기업지배구조는 제도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관행과 문화·전통으로 뿌리내려야 한다. 시간도 적잖이 걸릴 수밖에 없다. 김 회장이 거기에 하나의 주춧돌을 놓고 명예롭게 퇴진하길 시장은 기대하고 있다.



김광기 경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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