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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④ 다시 쑨원에게 길을 묻는다

중앙일보 2011.01.06 02:07 종합 4면 지면보기



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국가 의제) [1]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 잡자
“서양 패도 따를 것인가, 동양 왕도 지킬 것인가”
87년 전 일본에 던진 쑨원의 경고 … 오늘날 중국에 다시 묻다





쑨원의 생애 마지막 연설



‘차(次)식민지’. 100여 년 전 중국의 상황을 쑨원(孫文·손문)은 이렇게 표현했다. 갈가리 찢긴 중국의 모습이 식민지만도 못하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조공체제 부활을 점치는 목소리가 나온다. 영국의 좌파 이론가 마틴 자크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 동아시아 각국이 중국의 압도적 파워와 불평등한 관계 설정을 인정함으로써 마음은 불편하지만 대신 안정적 질서를 유지하는 ‘21세기판 조공체제’에 동의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과연 그럴까. 새로운 한·중·일 시대의 바람직한 동아시아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해 12월 19일 찾은 후베이성 우한(武漢)의 신해혁명박물관. ‘쑨원과 우메야 쇼키치(梅屋壯吉)’라는 이름의 특별 전시회 마지막 날이었다. 쑨원과 우메야가 주고받은 편지, 도쿄에서 있었던 쑨원과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의 결혼식 사진 등 신해혁명 당시의 생생한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이 전시됐다. 현장에서 눈물을 훔치던 82세의 한 중국 노인과 맞닥뜨렸다. 그는 “내 팔십 평생이 격동의 중국 역사와 일치하는데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느냐. 쑨원과 우메야 두 사람의 우의는 오늘날 중·일 양국 국민에게 무언의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우메야는 쑨원의 숨은 협력자였다. 영화사업으로 큰돈을 번 그는 27세 때 두 살 위의 쑨원과 의형제를 맺었다. 이후 요즘 돈으로 환산해 2조 엔이라는 거액을 무기와 탄약 구입 등의 혁명자금으로 지원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최근 우메야의 증손 고사카 아야노(小坂文乃)가 책을 내고 관련 자료를 공개하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됐다.



 쑨원에겐 많은 일본 친구가 있었다. 그는 30여 년의 혁명활동 기간 중 3분의 1 이상을 일본에서 보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서 중국의 미래를 모색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은 ‘대(大)아시아주의’란 형태로 정리된다. 그는 서양을 무력과 이익에 바탕을 둔 패도(覇道)문명으로, 동양을 인의와 도덕에 기초한 왕도(王道)문명으로 구분하고,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의 피압박 민족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중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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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흘러 중국은 이제 미국과 어깨를 견줄 G2 국가로 부상했다. 하지만 중국의 굴기를 바라보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지난해 9월 센카쿠(尖閣)열도 분쟁 때 중국이 보여준 맨얼굴은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한동안 잠잠하던 일본의 재무장론이 들썩이며 서점에선 중국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책들이 인기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거치면서 중국을 보는 한국의 시선에도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과연 중국의 이런 거친 모습이 쑨원의 유지에 부합하는 것일까. 혹자는 중국이 서구와 대등한 힘을 갖게 돼 쑨원의 뜻이 이뤄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모습을 바라는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쑨원이 주장한 아시아 협력이야말로 중국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왕이저우(王逸舟·왕일주)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주장한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국가주석의 외교 브레인으로 알려진 그는 “중국이 패권을 지향해서도 안 되지만, 앞으로 그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앞으로 한·중·일 시대는 어떻게 펼쳐져야 할까. “우리가 바라는 건 패권국가 중국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이 함께 번영을 구가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하는 중국이다.” 이홍구 전 총리의 말이다. 그는 또 “중국의 장래에 대해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중국인들의 예지가 창조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중·일 협력체제, 나아가 동북아 집단안전보장체제와 경제공동체 창설 등을 지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쑨원의 생애 마지막 대중연설이 된 1924년 11월 일본 고베에서의 강연회 장면.



 1924년 11월 쑨원은 일본 고베에서 일생의 마지막 대중 강연을 한다. ‘아시아주의’를 주제로 한 강연의 마지막 결론은 이랬다. “일본은 이미 유럽 패도의 문화를 이룩했고 또 아시아 왕도의 본질도 갖고 있다. 이제부터 서구 패도의 주구(走狗)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동방 왕도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지 일본인 스스로 잘 선택하기를 바란다.” 쑨원의 기대와 달리 점점 더 제국주의를 향해 치닫는 일본을 향해 던진 마지막 충고였다. 그 이후 일본이 어떤 길을 갔는지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이젠 쑨원이 일본에 던졌던 일갈을 중국에 되물을 차례다. 쑨원은 또 이런 말도 남겼다. “시대 조류에 순하면 흥하고 역하면 망한다(世界潮流 浩浩蕩蕩 順之卽昌 逆之卽亡).”





한·중·일 GDP 합치면 세계 18.6% … EU, NAFTA 맞먹는 경제권



신해혁명 당시 변방에 불과했던 동아시아가 100년 만에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한·중·일 3국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치면 세계의 18.6%에 이른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유럽연합(EU)에 맞먹는 경제권이다. 외환보유액은 세계 절반에 가깝다. 돈과 물건이 이 지역으로 몰린다는 이야기다. 세 나라가 힘만 모으면 세계 중심이 되는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한·중·일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한다.



 실제로 동아시아에선 다양한 한·중·일 협력체제가 구축되고 있다. “현재 한·중·일 간에는 100개 이상의 협력 사업이 정상회담 합의를 거쳐 가동되고 있다.” 정부 당국자의 말이다. 세 나라 대학에서 서로 학점을 인정해 주는 동북아판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구상이나, 서울(김포공항)-도쿄(하네다공항)-상하이(훙차오공항)를 셔틀편으로 엮는 항공협력 등은 실질적인 효과가 크다. 3국 정부 간 채널만 50여 개에 달한다. 2008년부터는 3국 정상 간의 협의 채널이 정례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협력은 여전히 취약하기만 하다. 세 나라가 그리는 지역의 장래상에 대한 그림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해법 도출이 어려운 영토 분쟁이 한·일 간, 중·일 간 뇌관으로 존재한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 해결방식을 둘러싼 인식의 괴리도 크다. 이 지역에서의 미국 역할에 대해서도 큰 차이가 있다. 더 큰 문제는 허심탄회한 논의를 힘들게 하는 신뢰 부족의 문제다.



 3국 간 불안 요소가 불거질 때마다 한반도는 요동친다. 반대로 이런 취약한 환경은 한국에 기회이기도 하다. 지역의 미래상을 그리고, 이를 실현시킬 전략과 로드맵을 짜고, 중·일을 조정하는 역할은 한국의 몫이기 때문이다. 3국 정상회담의 합의에 따라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을 오는 3월 인천 송도에 설치키로 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많은 이익 … 패권은 득보다 실이란 걸 안다”



[왕이저우 베이징대 부원장 인터뷰]












“쑨원이 일본의 패권 추구를 경계한 발언은 지금의 중국에도 유효하다.”



 왕이저우(王逸舟·왕일주·사진)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의 말이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역할을 강조하며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그는 “쑨원이 주장한 아시아 협력이야말로 중국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역설한다. 지난해 12월 17일 베이징대 연구실에서 왕 교수를 만났다.



 -중국의 부상이 새로운 패권 국가의 출현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중국이 패권을 추구할 가능성은 낮다. 중국 지도자들의 생각도 그렇다. 패권을 추구하면 득보다 실이 더 크다는 것을 중국은 안다. 개혁·개방이 그랬듯이 중국의 이익은 다른 나라와의 협력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가 싫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보여주는 모습은 이웃 나라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중국은 점점 배우고 있는 중이다. 중국의 정치 자유화와 언론의 자유도 발전하는 과정에 있고, 그 방향은 세계 여러 나라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꺼번에 모든 것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외국 친구들도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할 때 미국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민 중에는 중국이 미국을 아시아에서 배제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 그런 의도는 없다. 장기적으로 미국은 이 지역에서 계속 존재할 것이고, 군사적 관계도 유지될 것이다. 그게 현실이다. 중·북한 관계에 대해서도 우려가 있는 걸 안다. 중국과 북한은 옛날부터 혈맹관계였으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혈맹관계에서 정상관계로 조정 중에 있다.”



 -세계 질서의 중심이 서구에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나.



 “세계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어 태평양을 건너 중국·인도로 이동하고 있다는 관점이 있다. 나도 그랬지만 지금은 약간 다르다. 글로벌화 시대는 여러 나라가 다같이 발전하는 것이므로 중심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중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 원래의 중심이 낙후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쑨원은 아시아 국가들의 협력을 주창했는데.



 “그는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패도는 불평등한 아시아,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관계다. 왕도는 평등과 협력의 관계다. 쑨원의 가르침은 일본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오늘의 중국에도 유효하다. 쑨원은 대아시아주의를 말했는데 대(大)자는 뭔가 거만한 어감을 주므로 나는 신(新)아시아주의로 고쳐 말한다.”



◆특별취재팀=중국연구소 유상철·한우덕·신경진, 국제부 예영준·이충형 기자, 베이징·홍콩·도쿄 장세정·정용환·박소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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