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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6) 미국 방문 초대장

중앙일보 2011.01.06 01:28 종합 10면 지면보기

이승만·아이크 벼랑 끝 대치 … 갑자기 워싱턴서 나를 불렀다

1953년 4월 들어 한국에서는 휴전에 반대하는 시위행렬이 그치지 않았다. 한국의 젊은 학생들이 서울에서 휴전 반대 시위를 벌이는 모습이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특히 외신기자들이 머물고 있던 서울의 내자 호텔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눈물로 호소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사진전문잡지 라이프에 실렸다.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한다는 구상은 구상뿐이었을까. 미국은 어떤 의도에서 그런 구상을 했으며, 그를 실행할 움직임은 정말 있기나 했던 것일까. 이 대통령은 미국의 이런 의도를 알았던 것일까. 그랬다면 어떤 대응을 했을까.

 이른바 ‘에버레디 오퍼레이션’이라고 불렀던 이 대통령 제거 계획에 관한 의문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를 잘 알지 못한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미국이 구상까지는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실행에는 옮기기 힘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 스스로는 그런 판단 때문에 깊은 관심을 두고 지켜보지는 않았던 일이다.

 단지 여러 경로로 내가 전해 들은 내용은 있다. 1952년 7월의 부산 정치 파동 과정에서 군을 정치판에 동원하려던 이승만 대통령의 행동 방식이 전쟁을 한창 수행 중인 미군의 경계심을 자아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구상은 그때 태동(胎動)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산 정치 파동은 충분한 조건은 아니었다. 미국이 전쟁을 겪고 있던 대한민국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던 상황은 분명했으나, 한 나라의 지도자를 그런 이유만으로 제거한다는 것은 명분 차원에서 이미 결격(缺格)이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53년의 상황은 달랐다. 미국이 자국 국민의 거대한 여망(輿望)을 업고 추진하던 한국전쟁의 휴전이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암초(暗礁)에 계속 걸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거의 혼자서 그런 싸움을 주도해 가고 있었다.

 앞에서도 자세하게 소개한 것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 석방 문제를 비롯한 휴전의 여러 조건을 두고 워싱턴과 번번이 의견을 달리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국 국내에서는 휴전에 반대하는 데모가 거의 매일 벌어지면서 그 상황이 휴전 회담 상황을 취재하러 온 외신 기자들에 의해 계속 세계 언론에 오르고 있었다.

 북한과 중국은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망으로 휴전을 앞당기려는 분위기가 역력했고, 미국은 이를 기화로 국민의 반대 여론이 드높은 한국전쟁을 종식해 국내 정치에서 점수를 쌓으려고 나섰던 상황이었다. 그런 마당에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면서 휴전 반대를 주도하고 있는 이 대통령이 미국의 눈에는 결코 곱게 비칠 리 없었던 것이다.

 워싱턴 미 행정부가 ‘에버레디 오퍼레이션’이라는 이 대통령 제거 계획을 만들지 않았으면 오히려 이상할 일일 만큼 미국의 국가 이익이라는 관점에서는 이 대통령이 분명히 커다란 걸림돌임에는 틀림없었다.

 미국이 만약 그런 마음을 다잡았다면 그 제거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미군은 당시 수도 서울 일원에 국군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할 만한 역량이 있었다. 북쪽으로는 의정부 쪽에 작전 라인을 설정해 미군이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쪽의 국군 역량은 미군의 계획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미국이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면 전격적으로 이 대통령을 연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군의 이동을 막았을 것이다. 그 다음은 자신들이 짜놓은 후속적인 정치적 조치를 취해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역시 명분이 중요했다.

 “반공 포로를 석방할 것”이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한다고 해서 이 대통령을 제거한다면 공산군에 맞서 함께 싸운 동맹으로서의 미국은 세계적인 국가로서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봤다.

 미국이 설득과 위협의 두 카드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후자의 카드는 그렇게 실용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정보 공작의 차원에서 극단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 실행 계획을 짜놓은 수준에 불과했을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미국은 내 추정인데, 53년 5월 들어서 이 대통령 제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진지하게 검토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행에 옮길 단계는 역시 아니었다. 명분 등 여러 가지 차원에서 그런 계획을 실행에 옮길 상황은 아직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 사이의 갈등이 더 첨예하게 번진 때는 그 다음 달이었다. 이 대통령은 2년 넘게 이어져 온 길고 지루한 휴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인 반공 포로 석방 문제를 마침내 건드리고 말았다. 그런 방침을 먼저 전달해 상대의 의중을 뒤흔들어 놓는 ‘말’의 차원에서 ‘행동’의 차원으로 격을 아주 높여 전격적인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점은 나중에 다시 소개할 것이다.

 아무튼 한국과 미국 행정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미국이 급기야 이 대통령을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으로 이어질 정도였다. 아주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즈음의 내 눈에 들어온 미군의 움직임은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마크 클라크 장군은 고집스럽고, 때로는 힘들여 만든 국면을 크게 뒤흔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다가가 예전과 다름없이 워싱턴의 메신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 또한 휴전회담을 둘러싼 서울과 워싱턴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도 전선 상황을 충실하게 관리했다.

 서울에서는 그래도 여전히 휴전 반대 데모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고등학생과 중학생까지 모두 거리에 나서 울분과 함께 눈물의 호소로 휴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아주 혼란스러운 5월이었다.

 그 즈음의 어느 날 나는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나를 미국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군의 각종 군사시설과 교육기관을 시찰하고, 후반에는 미 지휘참모대학 특별교육과정에서 최고 지휘관 교육을 받아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담겨 있었다.

 그 당시로서는 휴전회담이 53년 7월에 정식 조인될 줄은 몰랐던 상황이었다. 서울과 워싱턴의 알력이 깊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군사 부문의 교류를 강화하면서 경무대와는 다른 차원의 교섭도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해 5월 초의 어느 날 비행기에 올랐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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