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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신년기획 대한민국 경제국보] 제4호 경부고속도로

중앙일보 2011.01.06 00:09 경제 2면 지면보기



사람밖에 없었다, 수백만 개 삽으로 언 땅을 팠다 … 세계 7위 수출 대국의 도약대 ‘경부고속도로’



건국 이래 최대 토목사업이었던 경부고속도로. 퇴근 무렵이면 도로 전체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긴 띠를 이루며 한국의 역동성을 상징한다. 지금이야 ‘미래를 내다본 혜안’으로 평가받지만, 당시엔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반대했다.





지난해 12월 30일 오후 3시 21분 호남고속도로 논산 방향. 25t 트럭 등 화물차 2대와 승용차 1대가 부딪치는 추돌사고가 발생했다. CCTV가 곧 사고 현장을 비췄다. 한국도로공사 교통센터(경기도 성남시 분당구)가 바빠졌다. 호남고속도로 센터에 상황을 통보했고, 곧 고속도로 순찰대가 출동했다. 사고 1시간 만에 정리가 끝났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 바로 옆에 있는 교통센터는 전국 고속도로망 상황을 관리하는 곳으로 1992년부터 운영됐다. 센터 중앙 스크린 양 옆엔 각각 54대의 CCTV 모니터가 24시간 가동되며 전국 고속도로를 비춘다. 지금은 첨단을 달리고 있는 한국 도로망. 출발은 쉽지 않았다. 숱한 반대를 이겨낸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조화로 가능했다. 본지는 물류 혁명 시대를 열고 세계 7위 수출대국의 밑바탕이 된 ‘경부고속도로’를 네 번째 경제 국보로 선정했다.













한국은 고속도로 강국이다. 전국 어디서든 30분 내에 고속도로에 들어설 수 있다. 모두 31개 노선, 3580㎞(민자 제외)의 고속도로가 얽혀 있다. 지구 반지름(6400㎞)의 절반을 넘는다. 물류와 관광, 레저를 아우르는 한국 경제의 신경망으로 한반도 여기저기로 뻗쳐 있다. 척추는, 단연 경부고속도로다.



 한반도 대동맥 경부고속도로는 익히 알려진 대로 리더십의 결정체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이라는 두 거인의 합작품이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대선 공약에서 고속도로 건설 의지를 밝혔다. 독일을 방문해 광부와 간호사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 후 고속도로 건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단기간에 되살아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우토반’이 있었다는 판단에서다. 당선 후엔 “내가 직접 건설추진위원장이 돼 보겠다”며 진두지휘했다. 서울~수원 노선을 직접 챙기고, 도로 건설에 필요한 땅의 면적도 꼼꼼히 계산했다. 책을 들춰가며 도로 폭을 헤아려보고 군대를 동원해 예산을 아끼자는 아이디어도 냈다.



 반대가 많았다. 아니, 모두 반대했다는 표현이 옳다. 국회는 “머리보다 다리가 크고 양팔과 오른쪽 다리가 말라버린 기형아 같은 건설”(1967년 국회 건교위)이라고 했다. 여당(공화당)도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등 경제부처는 재정파탄 우려로 반대했다. 서울∼부산보다 서울∼강릉, 포항∼부산∼순천∼여수∼광주 등 가로 방향의 도로 건설이 급하다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지적은 절대 바꿀 수 없는 금과옥조처럼 여겨졌다. 중소 도시의 몰락, 철도 사양산업화, 보여주기식 행정, 지역 불균형 발전 등 반대 논리가 총동원됐다.



 박 대통령은 그러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1967년 말 다음해 예산을 짜면서 그해 전체 예산의 23.6%인 429억7300만원을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비로 책정했다. 68년 2월 착공 후 2년 반 만에 왕복 4차로, 428㎞의 고속도로가 완성됐다. 여기에는 무소처럼 사업을 추진한, 정주영이라는 걸출한 기업인의 공로도 크다. 그는 죽으로 아침을 때우며 새벽 4시면 현장을 찾았고, 툭하면 현장 사무소에서 직원들과 어울려 잤다.















 두 거인의 리더십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 게 팔로워십이다. 공사기간에 투입된 연인원 892만8000명의 건설인력이 주인공들. 애초 612만 명이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300만 명 가까이 늘었다. 동원할 자원이라곤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투입 인원 중에는 기능이 따로 없는 ‘인부’로 분류된 이들이 절반에 가까운 48%를 차지했다. 이들은 휴일 없이 하루 19시간 작업하며 기계를 대신했다. 15㎞ 공사하는 데 1500명이 투입됐다. 공사기간을 단축하고자 겨울엔 언 땅 위에 짚을 깔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질러가며 작업을 했다. 트럭에 버너를 달고 반복 운행하며 땅을 녹이고 삽을 들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주역인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이 1970년 7월 7일 열린 완공식에 나란히 참석했다. [중앙포토]







 터널은 수많은 목숨을 삼켰다. 일본식 공법으로 직접 인부가 뚫고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지반이 무너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뚫던 터널은 다시 바위에 뒤덮였다. 현재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근처엔 위령탑이 있다. 77명의 사망자 이름과 일하던 공구가 새겨져 있다. 당시 육군 대위로 감독관을 맡았던 이성규(70)씨는 “실제 사망자는 훨씬 더 많아 수백 명 정도 된다”고 전했다. 대전 육교 구간 공사에선 시멘트 공사를 하다 관련 구조물이 무너지면서 3명이 현장에서 죽고 부상자만 30명 넘게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1970년 7월 7일에 완공된 것을 기리기 위해 77명만 추려냈다고 한다. 현재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던 공무원과 군인을 중심으로 ‘7·7회’란 모임을 꾸려 매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한다.



 이렇게 완성된 경부고속도로는 한국 사회를 확 바꿨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15시간 걸리던 것이 4시간대로 줄었다. 경부고속도로 자체만으로 현재 11조 7933억원의 가치를 지닌다(2010년 기획재정부). 국토연구원은 경부고속도로의 차량운행 비용 절감, 시간가치 비용 절감 등 13조6000억원(2005년 기준)의 직접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유류비용 절감액만 매년 2704억원이다.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고속도로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1973년엔 호남·남해고속도로가, 75년엔 영동·동해 고속도로가 뚫렸다. 건설업체들은 고속도로 건설 경험을 살려 중동에 활발히 진출해 ‘오일 머니’를 국내로 들여왔다. 경부고속도로라는 혈맥을 따라 1인당 국민소득은 249달러(1970년)에서 1만9734달러(2008년)로 80배 가까이 뛰었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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