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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234> 인도의 불교 8대 성지

중앙일보 2011.01.06 00:01 경제 18면 지면보기



룸비니 동산서 갓 태어난 붓다, 일곱 걸음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인도의 북부에는 불교 8대 성지가 있다. 2500년 전, 붓다가 태어나서, 수행하고, 깨닫고, 법을 설하고, 열반에 들 때까지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소다. 지금도 숱한 이들이 그곳을 찾는다. 그리고 붓다의 숨결, 불교의 정수를 찾고자 기도한다. 8대 성지는 단순한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성지마다 깃든 붓다의 메시지를 깨치는 일, 그게 순례의 진정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백성호 기자



붓다의 탄생지 - 룸비니









붓다가 금강경을 설한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에서 순례객들이 금강경을 암송하고 있다.







룸비니 동산은 현재 네팔 땅이다. 붓다의 8대 성지 중 유일하게 룸비니 동산만 인도 땅이 아니다.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은 친정으로 가다 이곳에서 왕자를 출산했다. 지금도 룸비니에는 출산 후 마야 부인이 목욕을 했다는 연못과 마야 사원이 서있다.











갓 태어난 붓다는 일곱 발짝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라는 의미다. 마야 사원 안에는 그 발자국이 새겨진 바윗돌이 전시돼 있다. 미얀마·태국·스리랑카 등 각국에서 온 불자들은 발자국 옆의 붉은 벽돌에 가져온 금박을 붙이며 기도를 한다. 그래서 주위 벽돌이 온통 금색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건 붓다가 내뱉은 깨달음의 소리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온 우주를 오직 채우고 있는 ‘하나’가 있다는 얘기다. 그걸 찾아야 ‘나의 참모습’을 찾는다는 메시지다. 왜 그럴까.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이 그 하나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그걸 터득한 붓다의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붓다의 열반지 - 쿠시나가르



룸비니에서 쿠시나가르까진 버스로 꼬박 6시간이 걸린다. 말년의 붓다는 고향으로 가던 중 쿠시나가르에서 열반했다. 당시 그는 지독한 등창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짧은 거리를 가면서도 몇 번이나 쉬면서 갔다고 한다. 쿠시나가르에는 열반당이 있다. 안에는 6.1m 길이의 불상이 옆으로 누워있다. 열반 당시 붓다의 모습이다.



당시 붓다는 80세였다. 죽음을 예감한 붓다가 사라나무 숲에 도착했다. 그러자 사라나무 꽃이 비처럼 내렸다고 한다. 꽃비를 맞으며 붓다가 말했다. “이것은 여래를 진정으로 공양하는 것이 아니다. 수레만 한 아름다운 꽃을 붓다에게 뿌린다 해도 그건 공양이 아니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다.”



붓다의 자리는 육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 자리를 찾고자 많은 순례객이 쿠시나가르의 열반당을 찾는다. 옆으로 길게 누운 붓다의 열반상을 보면서 눈을 감는다.



여성의 첫 출가지 - 바이샬리



2500년 전 인도의 바이샬리는 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였다. 북인도 최초의 공화국을 꾸렸던 릿차비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당시 바이샬리는 새로운 사상과 토론이 넘실대는 자유로운 도시였다.



붓다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다. 붓다 당시에는 여성 출가자가 없었다. 승단이 있었으나 정해진 숙소도 없었고, 들판이나 동굴에서 노숙을 하고, 탁발을 하던 처지였다. 그러니 여성 출가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엄마 대신 자신을 키웠던 이모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500명의 여성을 이끌고 먼지가 풀풀 나는 멀고 험한 길을 찾아와 출가를 청했을 때 붓다는 거절했다. 몇 번이나 거절했다. 그러다 “여성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시자 아난다의 물음과 청을 듣고서 허락하게 됐다.



그런 허락이 이뤄진 도시가 바이샬리다. 이곳은 또 유마 거사의 고향이다. 유마 거사는 재가자였다. ‘지혜 제일’로 불리던 붓다의 제자 사리불에게 “수풀 속에서 앉아만 있는 것이 수행이냐?”고 호통을 쳤던 인물이다. 붓다의 제자들도 쩔쩔맸던 깨달음의 눈이 유마 거사에겐 있었던 것이다.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원.







  불교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 - 라즈기르



라즈기르에는 죽림정사의 터가 있다. 아직 발굴 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조그만 동물원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다.



깨달음을 이룬 붓다는 이듬해 라즈기르를 찾았다. 당시 그는 36세였다. 붓다에겐 가섭이란 제자가 있었다. 그의 나이는 120세였다. 라즈기르 사람들은 “새파란 젊은이가 어떻게 숱한 제자를 거느린 120세 노인을 가르친단 말인가”라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때 가섭은 “나는 80년 동안 바람과 불, 해와 달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기도를 했지만 얻은 게 없다. 그런데 붓다를 만난 뒤 비로소 편안함을 얻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죽림정사 인근에 영축산(靈鷲山)이 있다. 독수리 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는 붓다가 머물렀던 여래향실과 아난다의 시자실 터도 남아있다. 붓다가 꽃을 들자 제자 중 가섭만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 일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깨달음의 보리수 - 보드가야



2500년 전, 보드가야의 네란자라 강 주변은 ‘인도의 계룡산’이었다. 무려 2만 명에 달하는 고행자와 수도자들이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리던 숲에 있었다. 붓다도 거기서 수행을 했다. 붓다의 수행은 처절했다. 처음에는 하루 한 끼,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끼를 먹었다. 한때는 하루에 쌀 한 톨과 깨 한 톨만 먹기도 했다. 뱃가죽을 만지면 등뼈가 만져졌고, 등뼈를 만지면 뱃가죽이 만져졌다고 한다. 그렇게 고행의 극한까지 갔지만 그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붓다는 고행을 접었다. 그리고 동네 처녀가 공양한 우유죽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그는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보리수 아래 앉았다. 그리고 새벽 별을 보면서 온전히 우주와 하나가 됐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라라(하프의 일종)의 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에는 마하보디 사원이 세워져 있다. 그 앞에는 높다란 대탑(大塔)도 있다. 2250년 전에 아소카왕이 세운 것이다. 사원은 세계 각국의 순례객으로 북적거린다. 자투리 공간마다 명상과 수행을 하는 이들로 붐빈다. 깔판을 아래에 대고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티베트 승려와 서양인도 많다.









쿠시나가르에 있는 붓다의 열반상.



붓다의 첫 설법지 - 사르나트



보드가야에서 붓다는 깨달음을 이루었다. 붓다가 고행을 접고 동네 처녀가 건넨 우유죽을 먹었을 때 그의 동료는 곁을 떠났다. ‘배반자’라고 욕하고 실망하며 붓다의 곁을 떠났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고서 “누구에게 이런 이치를 알려줄까?” 하고 생각하다 옛 동료를 떠올렸다. 그래서 사르나트로 갔다. 보드가야에서 사르나트까진 무려 320㎞, 서울에서 부산 간 직선거리였다.



그곳에서 붓다는 다섯 동료를 만나 법을 설했다. 붓다는 계속 이치를 설했고, 다섯 비구는 순번제로 돌아가며 탁발로 식량을 구해왔다. 이윽고 다섯 비구가 아라한(阿羅漢·깨달음을 성취한 자)이 됐을 때 붓다는 기쁨에 넘쳐 “여기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말했다. 자신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지금도 붓다의 최초 설법지에는 높이 43m의 웅장한 스투파(붉은 벽돌로 쌓은 탑)가 세워져 있다.



  금강경을 설한 곳, 기원정사 - 쉬라바스티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에서 붓다는 숱한 경전을 설했다. ‘금강경’을 비롯해 경전의 3분의 2를 기원정사에서 설했다. 지금도 그곳에는 붓다가 머물렀던 방의 터와 수행했던 경행처가 남아있다. 붓다가 ‘금강경’을 설한 자리에는 꽃이 가득 뿌려져 있다. 세계 각국에서 불자들이 찾아와 그 앞에서 ‘금강경’을 읊는다. 붓다는 기원정사에서 무려 24번의 안거(인도의 승가에선 우기 때 3개월씩 우안거를 하는 전통이 있었음)를 지냈다. 그만큼 기원정사에 머물렀던 시간도 길었다.



붓다가 머물렀던 방을 당시 ‘여래향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꽃을 꺾어와 붓다가 머무르는 방 앞에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붓다의 처소에서는 늘 꽃 향기가 풍겼다고 한다. ‘여래향실’이란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다.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이란 지명도 ‘쉬라바스티’의 음역이라는 설이 있다. 그게 지금의 ‘서울’이 됐다고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를 중시했던 신라는 ‘법흥왕’ ‘마야 부인’ 등 당시 왕이나 왕비의 이름에도 불교적 의미를 담았다.



  설화의 땅 - 상카시아



마야 부인은 왕자를 낳고 1주일 만에 숨졌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붓다는 나중에 천상에 올라가 설법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는 곳이 상카시아다. 그래서 상카시아는 설화의 땅이다. 불교 8대 성지 중에서도 상카시아는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지역도 외진 데다 아직 발굴도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상카시아의 풍경은 꽤 황량했다.



그러나 1600년 전 이곳에는 대사원이 있었다. 무려 1000여 명의 승려가 여기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사원의 터와 기둥의 흔적, 옛 벽돌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중국의 현장법사도, 신라의 승려 혜초도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상카시아에는 아소카 석주(石柱)만 말없이 서있다. 근처에는 인도 정부에서 만든 초라한 간판도 보였다. ‘이곳은 유적지며,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붓다는 시자인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야, 신심 깊은 사람들이 찾을 곳이 네 군데 있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깨달은 곳, 내가 처음 설법한 곳, 그리고 내가 열반한 곳이다.” 그건 삶을 통해, 일상을 통해, 생활을 통해 붓다의 생애를 좇는 것이 진정한 성지순례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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