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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인 성애도 온 인류를 사랑할 수 있어야 생동”

중앙선데이 2011.01.02 09:40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12>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은 사랑으로 현대인에게 불안과 절망을 안겨다 주는 소외와 분리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포토]



사랑에 대한 관점은 다양하다. 사랑은 사람에 따라 ‘유행가 가사’일 수도 있고 과학일 수도 있다. ‘사랑=섹스’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방중술(房中術), 이성을 유혹하는 법, ‘뒤탈 없이 헤어지는 법’에 대한 책들이 시중에 나와 있다.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1956년)이라는 책에 따르면 사랑은 기술이다. 여기서 기술은 ‘과학기술’의 기술이 아니라 ‘사물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이나 능력’을 말하는 기술이다. 기예(技藝)라는 말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기예는 ‘예술로 승화될 정도로 갈고 닦은 기술이나 재주’다.



사랑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면 사랑의 ‘유효 기간’ 문제가 해결될까. 연인들은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랑에도 유효 기간이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2~3년 정도 지나면 사랑으로부터 헤어나온다. 사랑이 식어 애인에 대해 무덤덤해지는 것이다.

사랑은 ‘빠지는’ 게 아니다



‘유효 기간’ 없는 사랑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사랑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사랑에 대해 알려면 ‘무엇이 사랑이 아닌가’에 대해 파악해야 한다. 사랑의 기술에 따르면 사랑은 ‘빠지는’ 게 아니다. 마치 단단한 땅에 발을 디디고 서는 것과 같은 게 사랑이다. 사랑은 어떤 대상을 만나 ‘사고’처럼 당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수동적인 게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다. 사랑은 ‘능동적인 힘’이다. 사랑은 받는 게 아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 받기 위해 섹스 어필을 보강하거나 성공한 사람의 자질을 갖추려고 하는 것은 쓸모가 없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는 힘이다. 성애(性愛)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랑은 뜨거운 감정이라기보다는 의지를 구사하는 선택이요, 결단이자 약속이다.



사랑은 흔하디 흔한 게 아니다. 가짜 사랑(pseudo-love)은 많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희귀한 현상’이다. 사랑이 희귀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트(art)이기에 학습할 수 있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사랑의 이론과 실천을 배워야 한다.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의 이론은 인간의 실존에서 출발한다. 봉건 사회에서 근대로 넘어온 이후 인간 실존의 핵심적인 본질은 소외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인간, 자연으로부터 소외돼 있다. 그래서 인간 실존의 과제는 분리(separation)를 극복하고 일치(union)를 이루는 것이다. 사랑을 통해 인간은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사랑의 이론을 학습함으로써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사랑의 요소를 알 수 있다. 배려·책임·존중·지식이 사랑의 요소다. 사랑의 요소들은 서로 연결돼 있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사랑의 이론은 사랑의 종류에 대해서도 알려 준다. 사랑에는 형제애·모성애·자애(自愛)·성애(性愛)와 신(神)의 사랑이 있다. 모든 종류의 사랑은 위협받고 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로 요약되는 형제애는 모든 사랑의 바탕이다. 형제애를 위협하는 것을 인간의 상품화다. 인간이 상품화되면 사랑은 일종의 거래나 교환으로 변질된다.



모성애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과 소유욕이 모성애를 위협한다. 자애(自愛·self-love) 없이 남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런데 이기심이 자애를 방해한다. 이기적인 사람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없다. 성애에는 배타성·독점성이 있다. 그러나 성애는 한 사람을 통해 온 인류를 사랑할 수 있어야 생동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성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 모든 인간의 평등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 이론은 필연적으로 사랑의 인류 차원, 사회적 차원을 주시하게 한다. 사랑은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건강하고도 만족스러운 해답”이다. 한편 신의 사랑을 위협하는 것은 신을 우상화하는 것이다.











사랑의 이론은 유치한(infantile) 사랑과 성숙한(mature) 사랑의 차이점에 대해 알려준다. 유치한 사랑, 성숙하지 못한 사랑에 머물러 있으면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 “나는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 반면 성숙한 사랑에 도달하면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필요하다.” 사랑의 이론은 사랑과 섹스를 둘러싼 오해를 불식시킨다. 사랑의 기술에 따르면 “사랑은 성적인 만족의 결과가 아니다. 반대로 성적인 행복이 사랑의 결과다”.

사랑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제력·집중력·인내력이 필요하다. 사랑 고유의 실천 요소도 있다. 나르시시즘을 극복하는 데서 확보되는 객관성과 믿음이다.

 

‘사랑학 원조’ 된 사회철학자

사랑의 기술은 미국에서만 500만 부 이상 팔렸으며 34개 언어로 번역됐다. 저자는 독일 출신의 미국인인 에리히 프롬(1900~80년)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하는 프롬은 사회심리학자·정신분석학자·사회철학자다. 그는 특히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년)의 생물학적 결정론과 카를 마르크스(1818~1883년)의 경제적인 결정론을 비판적 이해로 결합한 것으로 유명하다. 결합의 도구로 프롬이 사용한 것은 자유의 관념이었다.



프롬은 컬럼비아대학(1934~41년), 베닝턴대학(1941년), 멕시코국립자치대학(UNAM·1950~65년), 미시간주립대학(1957~61년), 뉴욕대학(NYU·1962년) 등의 대학에서 가르쳤으나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년), 건전한 사회(1955년), 사랑의 기술(1956년), 소유냐 존재냐?(1976년)를 통해 두터운 일반 독자층을 확보했다. 1960년대 미국 캠퍼스에서 프롬은 카운터컬처(counterculture)의 우상이었으며 사랑의 기술은 바이블 중 하나였다. 당시만 해도 사랑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흔치 않았다. 사랑의 기술은 현대 ‘사랑학’의 원조였다.



프롬은 모계·부계 모두 독실한 유대교 가문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한때 유대교 신학자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사회과학과 정신분석학의 세례를 받은 프롬은 26세에 유대교 신앙을 버렸다. 대신 프롬은 민주사회주의자가 됐다. 그러나 프롬의 사상에는 강한 종교성이 발견된다. 그는 적어도 지식 차원에서 신에 접근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神)은 무엇이 아닌가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는 신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된다.” 프롬은 스스로를 ‘무신론적 신비주의자(atheistic mystic)’라고 불렀다.



건전한 사회에서 프롬은 이렇게 말했다. “19세기의 문제는 신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20세기의 문제는 인간이 죽었다는 것이다.” 프롬은 ‘인간의 죽음’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사랑과 종교의 가치를 재조명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사회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년)는 프롬이 사랑과 종교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이상주의 이념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한다고 비판했다.



프롬에게 인류의 하부단위는 없었다. 오직 인류 그 자체만 존재했다. 그는 종교적·정치적 요인으로 인류를 분열시키는 데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이지만 시오니즘에 반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빼앗는 것을 비판했다. “조상들이 2000년 전 살았던 땅에 대해 모든 나라들이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이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민주사회주의자였던 프롬은 냉전이 미국과 소련의 상호 오해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지만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소련 공산주의에도 반대했다. 프롬은 1950년대 중반 미국 사회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민권·반핵·반전·환경 운동에 참가했는데 그가 추구한 이상은 ‘휴머니즘적이며 공동체주의적인 사회주의(humanistic communitarian socialism)’였다.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의 건전한 삶을 해친다고 봤다. 그는 “건강한 경제는 건강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치르는 대가 중 하나는 사랑의 왜곡이었다.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저에 깔린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양립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시장 경제가 사랑을 왜곡하는 측면은 물론 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랑은 어쩌면 인류의 기원부터 시작된 숙제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다수의 인류가 건강한 사랑, 유효 기간 없는 사랑을 누렸다고 하기 힘들다. 그러나 탈근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건강한 사랑을 위한 사랑의 기술이라는 매뉴얼이 있다.

 

김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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