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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653m 장터목은 ‘하늘 위의 시장’

중앙선데이 2011.01.02 03:07 199호 10면 지면보기
지리산은 홀로 장엄해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가슴에 사무친다. ‘달오름’ 인월에서 덕두봉으로 떠오른 산줄기는 세걸산·고리봉·만복대를 솟쳐 노고단까지 유장한 서곡을 울린다. 반야봉으로 몸을 대차게 뒤틀어 삼도봉·토끼봉·명선봉·칠선봉·촛대봉·연하봉·제석봉 등 1500m를 넘나드는 등뼈를 불뚝거리며 천왕봉을 향해 용틀임한다. 거칠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며 중봉·하봉의 원시의 능선으로 내닫고, 긴 꼬리를 휘끈 내둘러 도토리봉·웅석봉·달뜨기능선으로 휘돈다.

지리산 능선길 영과 재에 담긴 이야기들

그러나 지리산이 이름만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함은 봉우리가 첩첩하고 줄기가 창창하기 때문이 아니다. 산자락에 깃든 숱한 목숨붙이의 부르튼 발길이 골골 샅샅이 파도치고, 절절한 염원의 피땀이 걸음걸음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 고난과 투지의 삶에 어린 태극의 아우라가 서려 있는 곳이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로 파고드는 수많은 영(嶺)과 재다.

지난해 12월 22일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태극 종주의 첫걸음을 뗐다. 3시간을 쉴 새 없던 잰걸음이 따스한 아침 햇살 속에 흐느적거릴 때 첫 고개가 나타났다. 탁 트인 초원, 1010m 고지의 팔랑재였다. 봄이면 바래봉의 철쭉꽃을 보러 이곳까지 몰리는 인파에 짓밟히는 돌멩이에 고개의 유래가 서려 있었다. 진한과 변한에 쫓긴 마한이 성을 쌓고서 여덟 장수를 시켜 수비했다고 한다. 까마득한 기원전의 얘기라니 한 귀로 흘리고 서둘러 봉긋한 세걸산에 올랐다. 한눈에 펼쳐지는 덕두봉~성산재의 서북릉과 노고단~천왕봉~하봉의 주능선, 그 100리가 넘는 연봉에 넋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내 막막해졌다. 저 울쑥불쑥한 ‘하늘금’을 일일이 발로 밟고 또 그만큼 더 가야 할 200리 길이 아득했다.

12시간을 걸어 해가 뉘엿거리는 성삼재에 닿았을 때에야 종일 마한 최후의 요새에서 헉헉거렸음을 알았다. 성삼재는 한자로 姓三峙니 3명의 마한 장수가 수비를 했다. 굳이 각성바지로 뽑아 임무를 맡겼음이 고개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왼쪽 재너머로 7㎞ 되는 달궁에 피난 왕국의 궁궐인 ‘달의 궁전’이 있었다. 마한의 왕은 서쪽에도 장수를 보내 추격을 막았으니 우리가 한동안 멈춰 허기진 배를 달랜 정령치였다.

‘서산대사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84년 정씨 성을 가진 마한의 장군이 성을 쌓고… 지금도 군데군데 유적이 남아 있다.’

안내판은 正嶺峙로 표기되던 한자 이름도 鄭嶺峙로 바로잡아 적고 있었다. 피난 왕국의 얘기가 정사로 증명되지는 못했다지만, 서산대사가 적어 남긴 것으로 보아 허랑한 전설로 치부할 일도 아니었다. 실제로 서북릉의 형세는 달궁이 깃든 동쪽 사면은 완만하고, 운봉·남원으로 향한 서쪽은 수림이 빽빽한 급사면이었다. 능선 그 자체로 천연 요새였다. 임진왜란 때는 남원서까지 피난을 왔으니, 일찍이 이곳에 도성을 쌓은 마한의 안목이 놀랍다. 태극 종주의 첫날은 그렇게 지리산에 처음 족적을 남기며 필사적으로 삶을 도모한 개산(開山)의 숨결과 오롯이 함께했다.

하늘과 땅, 음과 양이 뒤섞여 하나 되므로 만물이 생동하는 것이 태극이라고 했다. 둘째 날 새벽의 어스름 속에 노고단을 넘어가는 길은 그런 태극의 시간이었다. 낮이 밤의 끝으로 파고드는 여명 속에 반야봉을 앞세워 불쑥불쑥 지리 주능선이 하늘을 뚫고 태동하고 있었다. 공중에 걸린 끈처럼 팽팽한 3.2㎞의 길 위에 새벽달이 떠 있고, 그 푸르스름한 빛 속에 임걸령이 누워 있었다. 종주 여정 중에 가장 꿈같은 길이었다. 신라의 화랑이 화살을 쏜 뒤 말을 달려 화살보다 빨리 도착했다! 전설이지만 그처럼 확실한 증언도 없었다. 조선 명종 때의 산적 두목인 임걸년(林傑年)도 이곳에서 무리를 이끌고 화살처럼 누벼 그대로 고개의 이름이 되었다.

빙판이 진 반야봉 허릿길을 돌아 삼도봉을 넘자 길은 아예 하산할 듯 밑으로 쏟아졌다. 그 끝에 주능선 가운데 가장 낮은 1315m 화개재가 움푹했다. 지리산의 양쪽에 사는 민초에게 삶의 숨통이 되어 준 재였다. 예부터 번성했던 경남의 화개장터에서 소금과 해산물을, 전북의 산내 방면에서 삼베와 산나물을 등짐으로 지고 넘나들며 비지땀을 흘렸다. 소금 가마니를 지고 뱀사골을 내려가다 계곡에 빠뜨려 ‘간장소’가 생겼다.

이처럼 영과 재의 본디 속성은 소통이다. 이쪽과 저쪽,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넘나드는 길목이다. 내게 있는 것을 남에게 주고, 없는 것을 가져오는 통로다. 둘째 날의 배낭을 푼 장터목은 고개가 운동장처럼 넓어 아예 장이 선 곳이었다. 경상도의 산청·함양·진주 사람들과 전라도의 산내·운봉·남원 사람들이 중산리와 백무동에서 올라와 물물교환을 했다. 이 땅에서 가장 높은 1653m ‘하늘 위의 장’이 왁자지껄했을 정경은 생각만 해도 흥겹고 아름답다. 종주 취재를 돕는 지원조 한 사람이 쌀과 부식 그리고 막걸리를 지고 올라왔으니 영과 재의 가치는 지금까지 변함없는 셈이다.

고개에 도로를 등산로보다 열 배는 넓게 뚫어 놓았지만 버려진 길도 있었다. 임걸령에서 장터목으로 오는 딱 중간에 벽소령이 있었다. 1969년부터 3년에 걸쳐 만든 비포장도로였다. 북쪽 삼정리와 남쪽 대성리 사이를 이은 도로는 무장 공비를 쉽게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다. 67년 몇 차례에 걸쳐 침투해 지리산 등에 숨어든 60여 명의 공비에 홍역을 치른 직후였다.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투입한 역사(役事)였지만 그 뒤 한 번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늘날도 빙빙 멀리 돌아가는 거리로 하여 등산객들로부터도 외면당하는 처지다. 빨치산과 국군의 처절한 상처를 간직한 지리산이 치른 값비싸고 뼈아픈 대가가 이 ‘길 아닌 길’이었다.

종주의 마지막 여정, 천왕봉을 싹둑 벨 듯 몰아치는 칼바람 속에 동남능선으로 태극을 마저 그리는 일은 힘겨웠다. 종아리까지 빠지는 눈길을 뚫고 키를 넘는 산죽 동굴을 헤쳐 쑥밭재·새재·외고개·왕등재·밤머리재를 타는 발길이 마냥 비틀거렸다. 낙엽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내리막에서 뒹굴기도 몇 번이었다. 그때 이제 사연도 잊히고 길도 묻힌 고개를 넘어다녔을 옛사람들의 가쁜 숨결이 떠올랐다.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신라에 나라를 뺏기고 산등성의 분지에 올라 2중 토성을 쌓고 항전했다는 왕등재가 있긴 했다. 왕등재를 지나 이름도 없는 고갯마루에 서서 가쁜 숨을 토했다. 돌아보니 지나온 산줄기가 고개에서 고개로 아스라한 하나의 ‘마루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거기 왕과 장수는 물론 산적·장사꾼·농사꾼·사냥꾼·산꾼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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