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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줄리아드 첫 동양인 교수 강효 25년 스승의 길을 말하다

중앙일보 2010.12.25 00:17 주말섹션 4면 지면보기



“사랑할 줄 아는 연주자는 음악에도 그 인품 보입니다”





훌륭한 연주자들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다.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벌 세노프스키(1926~2002)가 1964년 내한 공연에서 그랬다. 브람스의 협주곡 도중 갑자기 베토벤 협주곡의 카덴차(오케스트라 없이 독주자만 나오는 부분)를 연주했다. 베토벤은 원래 브람스가 다 끝나고 나오기로 돼 있었다. 전성기 시절의 연주자가 할 만한 실수는 아니었다.



 피로 때문이었다. 쉴 틈이 없어 바로 무대에 오른 게 화근이었다. 한국의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피로의 원인이었다. 연주 당일 세노프스키는 지휘자 임원식의 추천으로 서울대 음대 1학년생의 연주를 들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교수로 있는 피바디 음대로 데려오려 마음먹었다. 비자와 거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었다. 주한 미국대사관과 한국 정부 관계자를 차례로 만났다. 내한 공연으로 받은 출연료를 모두 유학 자금으로 대겠다고 약속했다.



 유학 준비는 신속하게 끝났다. 그해 9월, 학생은 김포공항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탔다. 도쿄·하와이·로스앤젤레스를 거쳐서야 도착한 샌타바버라에서 세노프스키와 음악제에 참가했고, 이듬해 뉴욕 줄리아드 스쿨에 입학했다. 세노프스키는 줄리아드 스쿨의 ‘대모’였던 바이올리니스트 도로시 딜레이(1917~2002)에게 학생을 우선 맡겼다.



 이 학생이 강효(65)다. 1964년 이처럼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건너왔던 그는 85년 줄리아드 스쿨 음악원 교수로 임용됐다. 동양인 최초, 최연소였다. 현재까지 25년 동안 길러 내보낸 바이올리니스트가 1000명이 넘는다. 매년 40여 명을 가르쳤다. 인터넷에는 ‘강효와 공부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웹 페이지가 따로 있을 정도다. 길 샤함, 사라 장, 김지연 등이 대표적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다



●처음 유학 갔을 때 무척 들떴겠습니다.



 “줄리아드는 말 그대로 최고의 학교였어요. 학생이 학생을 서로 기르는 곳입니다. 동기부여를 할 필요 없이, 뛰어난 동료들을 보고 자극받아 함께 커 나갑니다. 저도 그런 경우였죠.”



●한국 유학생도 별로 없었을 텐데 힘들었겠어요.



 “ 아무 연고도 없이 갔으니, 그랬죠. 그래도 그 시절엔 모두가 다 힘들었으니까요.”(강효는 음악인 중에서도 말수가 적기로 유명하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컸을 텐데요.



 “그땐 한국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어서 뉴욕 120번가에서 30번가까지 걸어 내려왔던 기억이 있어요. 한나절 동안 걸으며 지나는 식료품점마다 들어가 김치 비슷한 거라도 없을까 헤맸죠.”









도로시 딜레이



●그보다 더 힘든 일도 많았겠죠.



 “가장 많이 도와준 건 줄리아드의 도로시 딜레이 교수님이에요. 입학 후 처음으로 바이올린 실기 시험을 볼 때였어요. 레슨 시간에 음악은 전혀 가르치지 않는 거예요. ‘네가 이번이 첫 시험이라 잘 모를 텐데, 시험에 들어가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교수들이 심사위원으로 앉아 있다. 입을 쩝쩝거리기도 하고, 책상을 두드리기도 할 거다. 너는 그걸 극복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연주하는 동안 선생님이 옆에서 ‘소음 내는 연습’만 하는 겁니다. ‘아무리 시끄럽고 신경 쓰여도 연주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며 말이에요. 창문을 열었다 닫았고 물병을 떨어뜨리고. 참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실제 시험을 보러 가서야 이해를 했습니다. 제 성격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전 예민하고 완벽주의예요. 방금 한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앞으로 돌아가 다시 하고 싶어요. 또 연주를 앞두고 많이 긴장해요. 연주 중 뚝 멈춰버릴 위험이 있었던 거죠. 딜레이 선생님은 무엇보다 심리학의 천재였다고 봐요.”



●스승에게 음악만 배운 게 아니었군요.



 “아직 미국 생활에도 적응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 교수법이 주효했어요. 한번은 딜레이 선생님이 ‘네가 가장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더군요. 전 그림 그리는 걸 어려서부터 좋아했어요. 그랬더니 자기 집으로 오래요. 그 다음 번 레슨부터는 이젤(easel)을 두 개 갖다놓고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렸어요. 원 없이 그린 다음에야 바이올린을 잡았죠. 음악으로 놀듯 레슨을 했어요. 그러면서 ‘지금 이 부분은 아까 그림의 색깔처럼 해보면 어떻겠니’라고 제안하셨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 딜레이 선생님의 또 다른 제자인 이츠하크 펄먼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자기는 선생님에게 운전을 배웠다고요. 학생들마다 다른 심리 처방을 내렸던 거죠. 그 레슨실 한쪽 벽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해결 못할 일은 없다.’”



천부적 꿈, ‘교육자’



●좋은 스승을 만났기 때문인가요. 주목받는 독주자로 출발했지만 가르치는 데 더 중점을 두게 된 일 말입니다.



 “아무래도 영향이 있겠죠. 물론 절대로 딜레이 같은 선생은 못 될 겁니다. 제자에게 한번도 화낸 적이 없거든요. 저는 화도 팍팍 내고 소리도 지르고 그래요. 또 하나 영향이 있다면 저의 집안이 대대로 교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의사였는데 진료만큼이나 강연을 참 많이 하셨어요. 효성여대 학생들에게 특히 강의를 많이 했어요. 지금도 사촌 중에는 고등학교 교장, 중학교 교사 등이 많고요. 어려서부터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면서 자랐던 것 같아요.”



●바이올린은 아버지 권유로 시작했나요?



 “아버지의 사촌뻘 되시는 분이 바이올린을 가지고 왔어요. 아버지는 제게 성악을 가르쳤고, 형에게 악기를 배우게 했죠. 그런데 저는 그 친척분이 아주 짧게 바이올린 켜는 걸 보고 반해버렸어요. ‘세상에 어떻게 저런 소리가 있나’ 싶었죠. 형이 없는 사이에 악기를 이리저리 만져봤어요. 활을 물에다 잘 씻기도 하고, 활 털을 가위로 잘라도 봤어요.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인데, 당시에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소리가 날까 궁금했거든요. 결국엔 아버지가 저에게도 바이올린을 가르쳤죠.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바이올린 시작하기엔 꽤 늦은 나이네요.



 “아무래도 일찍 시작했으면 더 편했을 테죠. 하지만 당시 대구에서 선생님이 오선지에 직접 그려온 악보를 이골이 나도록 연습했어요. 지금도 그 음을 외우고 있어요. 그냥 좋아서 한 거예요. 새로운 곡을 배워 또 내 것이 되는 게 좋고, 그래서 또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곤 했습니다. 바이올린을 배운 지 3년쯤 됐던 중학교 1학년 때 대구시립교향악단에 들어갔어요. 요즘 오케스트라를 생각하면 중학생 단원은 말이 안 되죠. 하지만 전쟁 직후였고 어수선했던 때였으니 단원 한 명이라도 필요했던 거죠.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집중해 열심히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전문 연주자가 되는 데 집안 반대는 없었습니까.



 “제가 삼형제 중 막내입니다. 두 형이 모두 아버지 직업을 물려받아 의사가 됐어요. 하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노래와 음악에 푹 빠져 있는 걸 아버지도 아셨기 때문인지,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별 반대는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 지나는 말처럼 아버지에게 ‘저도 의사가 되길 바라셨나요’ 하고 물었더니 ‘의사가 됐으면 안과의사를 시키려 했다’고 하시더군요. 의사로 생각해 보신 적은 있을지 몰라도 강요는 하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교육자를 어려서부터 꿈꿔왔다니, 줄리아드에 임용되고 무척 설렜겠습니다.



 “성격이 그렇지가 못해요.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가 드디어 동양인 교수에게도 문을 열었다고 감격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저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책임감 뿐이었어요. 특히 첫 학기 첫 실기시험에 학생들 채점을 하러 갔는데 꿈에서나 보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저와 같은 자격으로 앉아 있는 걸 보고 부담이 더 커졌습니다. 시몬 골드베르크, 요제프 푹스, 그리고 저의 선생님이었던 도로시 딜레이와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 25년 동안 학생을 가르치게 될 줄 알았나요.



 “원래 어떤 큰 꿈이나 계획을 정해놓고 그걸 위해 안달하지 않아요. 그저 좋으니까 했던 겁니다. 처음에 바이올린을 잡은 것도 그렇고, 미국에 유학 온 것도 음악이 좋아서였습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정말 좋지 않으면 못 했을 겁니다. 실력이 느는 걸 보면 정말 좋아요. 주는 대로 자라는 풀들 같습니다. 물론 어떤 학생들은 정말 말도 안 듣고 열심히 하지 않을 때도 있었죠. 교수가 되고 얼마 안 돼 이런 걱정을 딜레이 선생님에게 했더니 또 명언을 해줬습니다. ‘그 아이도 준비가 되면 할 거다’. 선생은 준비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걸 배우고 아찔했어요.”



●현재 가르치고 있는 학생은 몇이나 됩니까.



 “이번 학기에 37명이고 이들을 각각 한 주 한 번 레슨해요. 일주일에 37명 가르치는 셈입니다. 줄리아드 예비학교와 대학생들, 그리고 예일 학생들까지 해서요. 2006년부터 예일대학에서도 교수로 일하고 있어요. 지금 학생이 약 1000명 될 거예요. 이제 미국에선 어디를 가도 제자들이 있더군요.”



연주는 멈춰도 교육은 못 멈춰









2009년 3월 세종솔로이스츠 15주년 기념 연주를 앞두고 리허설 중인 강 교수.



●무엇을 가르칩니까.



 “크게 셋입니다. 우선은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아무리 연주를 많이 하는 세계 일류 바이올리니스트라도 기본이 부족하면 언젠가 무너집니다. 둘째로 중요한 건 상상력이에요. 모든 연주자는 자신이 생각할 줄 아는 만큼만 연주합니다. 많이 듣고 읽고 경험해야 해요. 마지막으로 친구가 중요합니다. 모든 학생에게 ‘친구들 연주를 최대한 많이 듣고, 서로 격려하라’고 충고합니다. 성격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믿어요. 인생도 음악도요. 다른 사람을 응원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음악에도 그 인품이 보입니다. 연주에 생각이 다 보이기 때문에 연주자는 평소에도 훌륭한 사람이어야 해요. 줄리아드 졸업생을 중심으로 1994년 현악 앙상블 ‘세종 솔로이스츠’를 만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쟁쟁한 실력의 독주자들이 모인 앙상블이지만 어느 한 명이 솔로를 할 때 다른 친구들은 힘껏 반주해 줍니다. 연주하러 나갈 때마다 등 두드려주고 박수 쳐주죠. 그 모습을 보면 더 이상 뿌듯할 수가 없어요.”



●음악보다는 인생을 설계해 주는 것 같습니다.



 “나의 문제점과 생각이 학생에게 반영이 안 돼야 좋은 선생이라고 생각해요. 지식이 풍부해 그걸 알려주려고 하거나 많은 말을 해서 내 생각을 심어주고 싶은 욕심이 들기 쉬운 게 선생이에요. 하지만 스승은 자신을 버리더라도, 학생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뭔지를 알고 있어야 해요. 긴 호흡으로 학생의 생활과 삶과 인생까지도 보고 있어야 하죠. 예를 들어 한 학생이 실력이 통 늘지 않아 고생하고 있을 때 제가 어떤 곡을 공부하도록 시켰더니 갑자기 다른 연주자로 바뀔 때가 있어요. 근데 이렇게 비약적 발전을 이뤄주는 곡이 또 학생마다 다 달라요. 바로 그 전환점을 찾아주는 게 제 역할인 거죠. 그럴 때 제가 또 제일 행복하고요. 신청하는 학생을 받아 딱 한번 가르치는 공개 레슨을 되도록이면 안 하려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현재 실력만 한번 봐서는 뭔가를 가르칠 수 없어요. 여러 번 만나고, 사람을 알아야죠.”



●연주자 길에 미련은 없나요.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 전혀 없어요.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게 한 10년쯤 됐을 겁니다. 미국·캐나다에서 피아노4중주로 순회 연주를 했죠. 그때까지 또 연주자로서 최선을 다했고 행복했어요. 그 이후엔 학생이 늘어나 연주를 감당할 수 없었죠. 또 기회가 닿고 여건이 바뀌면 연주할 거예요. 지금도 연습은 늘 합니다.”



●교육자로서의 은퇴는 언제쯤일까요.



 “가르치는 건…. (잠시 생각 후) 글쎄요…. 줄일 수는 있어도 멈출 수는 없지 않을까요.”



글=김호정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줄리아드 스쿨 총장 “그린스펀도 다녔다 … 예술만 하는 예술가는 기르지 않는다”



줄리아드는 어떤 학교









조셉 폴리시 줄리아드 총장. [신인섭 기자]



“학교 졸업생 중 하나가 뉴욕 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학생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의과대학 과정도 어려웠지만, 줄리아드 공부야말로 힘들었다’고요.”



 조셉 폴리시(62) 줄리아드 총장이 두 달 전 서울 강연과 j 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예술은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입니다. 강도 높은 자기 훈련이죠. 때문에 예술가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강조한 줄리아드의 교육 철학은 ‘예술이 전부가 아닌 예술가들(Artists not only by arts)’을 기르는 것이었다. “예술만 하는 예술가는 기르지 않습니다.”



졸업생은 어디로



 줄리아드는 매년 700명의 졸업생을 낸다. 폴리시 총장은 인터뷰에서 “그중 75% 정도가 예술가의 길을 간다”고 했다. “나머지는 의사, 변호사, 사업가가 됩니다. 우리는 매년 일일이 학생들의 진로를 추적하지는 않습니다. 예술가들은 졸업 직후 직업을 구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죠.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없습니다. 하지만 졸업생들이 어떤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학교에서 맛본 최고에 대한 경험을 훌륭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앨런 그린스펀 전(前)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뉴욕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기 전인 1943년부터 2년 동안 줄리아드에 다녔습니다. 클라리넷을 전공했죠. 사회의 리더에게는 올바른 마음이 있어야 하고, 예술이 이들을 돕는다는 믿음으로 학생들을 기릅니다.”



재학생이 배우는 것은



 졸업생만큼 재학생들의 무대도 넓다. 공연장이나 작업실에만 박혀 있지 않는다. “재학생 50% 이상이 ‘뮤직 어드밴스드(Music Advanced)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사회 참여 과정입니다. 미국 내 도시는 물론 남미 ·아프리카 등에서 사회 소외계층에 예술을 전하는 일이죠. 공연을 열기도 하고 학교에 찾아가 음악과 미술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런 프로그램은 전부 학생이 짭니다. 학교는 학생의 아이디어를 도와 발전시키는 역할만 합니다. 사업을 직접 해보게 하는 교육인 셈이죠.”



 이 과정은 폴리시 총장이 1984년 부임하고 90년대에 만든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습니다. 순수 예술교육 시간을 빼앗길 거라는 우려가 많았죠. 하지만 몇 해 동안 이 프로그램을 가동해보니 더 나은 사람과 예술가가 돼 있는 학생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졸업을 하고도 아프리카·아시아 등에서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술이 전부가 아닌 예술가’는 폴리시 총장 자신이기도 하다. 그는 50년 동안 뉴욕필하모닉 단원이었던 바순 연주자 윌리엄 폴리시(1908~84)의 아들이다. 폴리시 총장 역시 파리 음악원에서 바순을 배웠다. 프랑스로 유학하기 전에는 코네티컷대에서 정치학으로 학사, 터프츠대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는 예일대에서 음악학으로 받았다. 예일대(76~80년), 맨해튼 음대(83~84년) 학장을 차례로 거쳐 36세에 줄리아드 6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세 자녀 중 둘째 아들 역시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경제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입학생의 조건은



 “줄리아드가 원하는 인재는 시험 잘 보는 천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악기 연주 능력만 출중한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디션을 거치려면 어느 정도의 실력이 있어야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잠재력이고 상상력입니다. 현재 재학생 85%가 장학금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100%로 늘려가려 합니다. 재정을 걱정하지 않는 다양한 계층의 학생들이 한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폴리시 총장은 줄리아드의 ‘일류 비결’을 주변환경에서 찾았다. 뉴욕 서북쪽 65번가의 링컨센터를 줄리아드와 함께 쓰고 있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은 소속 성악가들을 학교에 강사로 보낸다. 또 링컨센터를 ‘홈구장’으로 하는 뉴욕필하모닉의 지휘자는 당연직으로 줄리아드에서 강의한다. 줄리아드만의 ‘현장 실습’인 셈이다. 또 음악·무용·연극 전공이 한 학교에서 공부하는 점도 특징이다. 폴리시 총장이 “줄리아드는 세계 최고의 위치를 지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를 유지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게 하는 든든한 배경이다.



사진=신인섭 기자



j 칵테일 >> 줄리아드의 사람들















피아니스트 강충모씨가 줄리아드 스쿨 음악원 교수로 임용됐다. 내년 9월부터 뉴욕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피아노 담당으로는 1905년 개교 이래 최초의 동양인 교수다. 한국 음악인으로는 세 번째다. 1985년 강효, 2007년 정경화(바이올린)에 이어서다.



 줄리아드 재학생들의 국적은 40여 개에 달한다. 그중 한국인 비율은 크다. 강효 교수는 “아마 현재까지 졸업생 중 최다일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교수 임용만큼은 보수적인 편이었다. 다른 학교들처럼 교수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대신 명성과 실력, 경력 등을 내부에서 평가해 개별 접촉한다.



 명문학교의 가장 큰 자산은 역시 졸업생. 한국계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정트리오’의 정명화·경화·명훈, 소프라노 홍혜경·신영옥,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이 학교 출신이다. 세계적으론 첼리스트 요요마, 바이올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먼과 미도리,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 등 음악계의 ‘스타 공급원’이다. 소프라노 홍혜경은 “이 학교에선 학생 오페라를 만들어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올린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학교는 어디에도 없다. 이때 오페라를 처음으로 알았고, 평생 오페라 가수로 살겠노라 다짐했다”고 회고했다.



 음악원·무용원·연극원 중 음악원 규모가 가장 커 한 학년 학생이 500명이다. 나머지 무용·연극 전공은 각 100명씩이다. 이 분야에서도 걸출한 졸업생이 나왔다. 배우 로빈 윌리엄스, 케빈 클라인, 케빈 스페이시, 제이미 폭스 등이다.



 교수진 또한 든든한 인적 자산이다.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는 1970년대에 초빙돼 학생들을 맡았다.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를 길러낸 도로시 딜레이는 1948년부터 200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50여 년 머물렀다. 현재 뉴욕필하모닉의 악장인 글렌 딕터로, 피아니스트 에마누엘 액스, 트럼펫 연주자 윈턴 마셜리스 등이 학교를 이끌고 있다.



 이들은 예술의 중심축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려놓은 일등공신이다. 20세기 이후 미국의 부를 상징하는 듯 거대한 복합문화공간 링컨센터와 그 안에 위치한 줄리아드, 그리고 줄리아드 사람들은 예술 신대륙의 파워를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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