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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보다는 시에 취하라

중앙선데이 2010.12.19 01:26 197호 31면 지면보기
법조인들에겐 이성적·논리적 사고가 중시된다. 응당 술과는 거리감이 있어야 맞을 법하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직역을 꼽으라면 법조계가 빠지지 않는다. 기자가 법조 출입을 시작한 1990년대 중반만 해도 낮술은 관행이었다.

On Sunday

점심 때 와인으로 시작한 회식이 저녁 술자리까지 논스톱으로 이어진 적도 있었다. 검찰 고위 간부뿐 아니라 평검사들도 스폰서가 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부장검사급 간부와 술자리를 할 때였다. 이 간부가 폭탄 발언을 했다. “언론계 고위층 인사 한 명을 수사 중이며 조만간 사법 처리한다”는 얘기였다. 갑자기 술자리가 어수선해졌다.

동석한 기자들이 “진짜 사실이죠?”를 연발하자 그는 알듯 모를 듯한 미소만 지었다. 다음 날 아침 한 조간신문에만 1면 1단으로 기사가 나갔다. 감찰 조사 후 문제의 간부가 인사 조치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됐다.

99년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도 원인은 낮술이었다. 그 후 검찰 내 낮술이 금지됐다. 법무부 장관, 국정원장을 지낸 김성호 행복세상 이사장은 몇 해 전부터 폭탄주를 끊기보다는 적게 마시기를 권한다. 그게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폭탄주 잔보다 작은 유리잔을 제작해 지인들에게 나눠 준다. 부피로 치면 보통 잔의 3분의 1이다. ‘술잔이 아니다’는 뜻의 ‘불고(不<89DA>)’가 유리잔에 적혀 있다. 논어(論語) 옹야(雍也)편에 ‘고불고 고재고재(<89DA>不<89DA> <89DA>哉<89DA>哉)’라는 구절에서 따왔단다.

시인들 중에는 술을 즐기는 이가 적잖다. 술을 마시면 우뇌의 활동력이 증가하면서 상상력과 표현력이 풍부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태백도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다고 전해진다. 그가 남긴 명시 ‘월하독작(月下獨酌·달빛 아래서 홀로 술을 마시며)’의 앞 네 구절은 이렇다.

화하일호주 독작무상친(花下一壺酒 獨酌無相親) 거배요명월 대영성삼인(擧盃邀明月 對影成三人)
해석하면 ‘꽃밭에 술 한 단지를 들고 와 친구도 없이 홀로 앉아 마시려네, 잔 들거니 덩달아 밝은 달 돋아 달님과 그림자와 나 셋이 되었구나’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이태백이 술 마시던 풍경이 산수화처럼 떠오른다. 일단 장소는 시골이다. 꽃밭과 밝은 달, 달 그림자로 유추 가능하다. 주종은 십중팔구 곡주다. 요즘으로 치면 막걸리나 한산소곡주 같은 친환경 술이다. 술이 담긴 단지는 친환경적 도구다. 플라스틱이나 비닐용기가 아니다. 홀로 마시니 강권이 없다. 적당히 취기가 오를 만큼만 마셔도 무방하다. 도수가 높은 폭탄주를 여러 잔 들이켜고, 차수를 변경해 가며 술을 들이붓는 요즘과는 차이가 커 보인다.

연평도 사건에 이은 구제역 확산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지만 연말 송년회 술자리는 이어지고 있다. 독감까지 기승을 부려 자칫 술 한 번 잘못 마시면 병원 신세 지기 딱이다. 안 마실 수 없다면 양을 적게,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는 주종을 택해 마시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여럿이 함께 모여 시를 낭독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술은 입으로 마시지만 시는 가슴으로 마시며, 술에 취하면 숙취가 남지만 시에 취하면 여운이 남는다’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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