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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31) 도쿄에서의 이승만

중앙일보 2010.12.16 00:56 종합 10면 지면보기



요시다 혼냈다는 이승만의 ‘조선 호랑이’ 무용담 진실은 …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월 한반도로부터 50~100마일(약 80~160㎞) 떨어진 해상의 선을 이어 대한민국의 해양주권선으로 선포했다. 이른바 ‘이승만 라인’이다. 이곳에 독도를 넣어 한국 영토임을 더욱 분명히 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선을 넘어오는 일본 어선에 대해선 “무조건 나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한국에 나포된 일본 어선들이 끌려와 정박해 있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비행기는 곧 하네다(羽田) 공항에 내렸다. 일본 또한 당시에는 민간 여객기를 띄울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다. 해외로 나가는 비행기는 모두 미군 군용 수송기 정도였다. 따라서 당시의 하네다 공항도 미군이 한국에서 사용하는 비행장과 다를 바 없었다.



 공항에는 김용식 주일 공사(나중에 외무부 장관을 지냄)가 나와 있었고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부부와 주일 미국대사 등 미국 인사들, 그리고 오카자키 가쓰오 일본 외상과 와지마 아지야 외무성 아시아 국장 등이 마중 나와 있었다. 트랩을 내리는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 수영만 비행장을 떠날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곧장 숙소가 있는 도쿄 시내의 신주쿠(新宿) 인근 메구로(目黑)구로 향했다. 당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이 묵고 있던 관저였다. 일명 ‘마에다 하우스’라는 곳이었다. 에도 바쿠후(江戶幕府) 시절, 도쿠가와 쇼군(徳川將軍) 집안을 제외하고 둘째로 많은 재산과 영지를 보유했던 가가(加賀) 영주 마에다(前田) 가문이 도쿄의 저택으로 사용했던 곳이었다. 당시 듣기론 넓이가 평수(坪數)로 9000평(약 2만7750㎡)에 이르는 대저택이었다.



 이 대통령 내외는 그 안의 한 숙소에 자리 잡고, 수행원인 나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주변의 한 호텔에 머물렀다. 우리가 한국에서 떠나기 전인 4일에는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의 둘째 동생인 지치부노미야(秩父宮)가 세상을 떠났다. 일본 정부는 그 때문에 다소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였다.



 사실 이 대통령의 방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직후인 1948년 가을에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기도 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초청으로 일본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순반란사건’이 벌어져 급거 귀국해야 했다. 일본 정치인들과의 만남도 당시에는 없었다.









일본인들이 이승만 라인에 항의해 ‘이 라인 절대 반대’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하는 장면이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회담은 다음 날 열렸다. 한국과 일본의 첫 정상회담이었다. 장소는 이 대통령이 머물던 마에다 하우스였다. 한국 측에서는 이 대통령과 김용식 주일 공사,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와 오카자키 외상이 나왔다. 회담을 주선한 미국 측에서는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과 머피 주일 대사가 참석했다. 나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회담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백발이 성성한 이 대통령과 요시다 총리는 우선 기념 촬영을 했다. 이어 두 정상과 함께 회담 대표들이 곧장 회담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손원일 총장과 함께 회의장 밖에서 회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회담 결과는 ‘결렬’이었다. 당시 이 대통령은 52년 1월 ‘이승만 라인’을 선포해 해상에서 그 안으로 들어오는 일본 어선을 무조건 나포했다. 따라서 일본과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승만 라인’은 일본의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이 대통령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난 조치이기도 했다.



 회담을 끝내고 나온 김용식 주일 공사에게 들은 내용에 따르면 회의 석상에서 줄곧 발언을 한 사람은 이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요시다 총리는 주로 듣기만 했다는 것이다. “양국의 수교 협상이 잘 풀리기를 바란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에 요시다는 “일본은 향후 어떤 나라도 침략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군국주의로 다시 일어나는 일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의 첫 한·일 정상회담과 관련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화제(話題)가 하나 있다. ‘조선 호랑이’에 관한 내용이다. 항간(巷間)에는 이 대통령의 무용담(武勇談)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다.











 그 내용은 이렇다. 회담에 들어갔던 요시다 총리가 느닷없이 호랑이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는데, 아직도 있느냐”고 그가 물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이 “이제는 없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이가 다 잡아갔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는 것.



 이 이야기는 먼저 이 대통령이 와 있던 도쿄 시내에 퍼졌다. 주로 일본인에게 설움을 당했던 재일동포들 사이에서 번졌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 에피소드가 잘 알려져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통쾌하게 일본에 대응했다”는 반응을 얻으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한국과 일본이 정식으로 수교를 맺을 무렵에도 이 대통령의 이 일화는 사람들의 입에 즐겨 오르곤 했다.



 해상(海上)에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독자적이면서도 꽤 광역(廣域)의 ‘이승만 라인’을 선포한 뒤 이곳을 넘어오는 일본 어선을 사정없이 나포해 버렸던 이 대통령이었다. 더구나 반평생을 식민지 조국의 독립에 바쳤던 이 대통령이었으니 그에 대한 여망(輿望)이 대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강인한 성격의 독립운동가였으니 이 대통령이 요시다 총리를 혼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사람들이 그려 보는 이 대통령의 성격도 진실과는 차이가 있다. 이 대통령은 앞에서도 자주 언급했지만 생각이 깊고 행동이 진중한 스타일이다. 어떤 이는 강한 카리스마의 이 대통령이 쉽게 역정을 내거나 자주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는 사람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성격이라면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닥친 해방 정국에서 우뚝 일어서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대통령에게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상과는 다른 면모가 있다. 주변 상황을 치밀하게 살피고 매우 사려가 깊은 합리적 판단을 내린다는 점이다. 우선 한반도의 호랑이에 얽힌 실제 내용은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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