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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시시각각] 고통의 기쁨

중앙일보 2010.12.14 07:26 종합 38면 지면보기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




서구 전통에서 신정론(神正論·theodicy)이라는 종교·철학 분야는 세상에 악(惡)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따진다. 세상 사람들은 악 때문에 고통 받는다. 만약 신(神)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선하다면 신은 왜 인간이 악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도록 방치할까. ‘민주주의의 신’이 있다면 그에게 질문할 게 있다. 적어도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화된 한국에서 날치기라는 악습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날치기 하면 연상되는 것은 권위주의다. 두 번의 여야 간 정권교체로 민주화가 진전된 한국에서는 날치기는 마땅히 사라졌어야 했다. 날치기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의식(儀式)처럼 돼 버렸다. 의식에 대해 학문적으로 다양한 정의가 나와 있다. 어떤 학자는 의식을 “외부인들이 보기에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행위의 집합”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날치기 의식에 딱 들어맞는 정의다. 여야 국회의원들의 몸싸움, 고성, 발차기… 날치기만큼 세계인이 보기에 이상한 게 또 있을까. 날치기가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의식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날치기는 이제 한국 정치의 병리 현상이 아니라 아예 한국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우리 정치 문화에서 날치기는 진화하고 있다. 건국 후 수십 년간 날치기는 집권 연장의 수단이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에서 날치기는 ‘민주화를 심화시키는 수단’ 쯤으로 구사됐다. 현 정부에서 날치기는 ‘정책·예산형’이다.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법안 통과와 예산 확보가 날치기의 주된 원인이다. 날치기의 명분으로 제시된 것도 ‘예산안 처리의 불가피성’이며 후폭풍의 눈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복지 예산, 템플스테이 예산 누락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날치기의 고통이 종국에는 기쁨이 된 전례가 많다. 예컨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1979년 날치기로 통과된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안이다. 제명안의 날치기 통과는 부마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다. 96년 여당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노동법 개정안도 97년 민주당의 대선 승리라는 기쁨으로 돌아왔다.



 날치기의 고통이 결국엔 기쁨이 된다는 공식이 앞으로도 성립할까. 만약 그렇다면 현 야권은 2012년 총선·대선에서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12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실시된 ‘국민혈세 날치기 MB 독재 심판 정당 시민사회단체 결의대회’에서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2012년 총선, 대선에서 이명박 정권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다시 우뚝 세우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결의대회의 ‘수적인 열기’는 뜨겁지 않았다. 이를 설명한 것은 국민참여당 유시민 정책연구원장이다. 그는 “극악무도 패륜적 날치기에도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은 것은 한나라당 이명박 정권을 정리해고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과연 그럴까. 야권이 재집권을 바란다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날치기가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날치기=권위주의’라는 등식은 옛날 이야기다. 국민의 상당수에게 날치기는 지지하는 정책의 예산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다. 민주당이 재집권을 위해 끌어안아야 하는 것도 바로 이 ‘국민의 상당수’다. 국민은 날치기에 둔감해진 것이 사실이며 과거 일부 날치기 사례를 ‘긍정적’으로 보는 국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날치기는 민주주의와 같은 배를 탈 수 없다.



 신정론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에 악이 있고 고통이 있는 이유는 보다 큰 선(善)을 위해서다. 최근의 날치기는 민주 발전이라는 보다 큰 선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정치권은 향후 ‘날치기 금지법’이라도 통과시켜 날치기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국민·유권자가 할 일도 있다. 날치기는 “법안을 가결할 수 있는 의원 정족수 이상을 확보한 당에서 법안을 자기들끼리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는 일”이다. 유권자는 각 정당에 골고루 기회를 줘 날치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해야 한다.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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