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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유리거울 보급 100년, 외모지상주의도 함께 퍼져갔다

중앙일보 2010.12.14 00:10 종합 37면 지면보기


개항기의 경대(鏡臺).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9세기 말까지도 유리거울이 달린 경대는 부잣집 혼수품으로나 사용되는 사치품이었고 보통 사람들은 물동이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유리거울은 아주 빠르게 확산됐고 크기도 커졌다. 작은 유리거울이 달린 경대는 큰 유리거울이 달린 화장대로 바뀌었고, 근래에는 어느 집에나 전신 거울 하나씩은 걸리게 됐다. 거울이 커지는 데 따라 자기 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얼굴에서 전신으로 확장됐다.

갑자기 열이 오르고 힘이 빠지며 머리·허리·배가 아프고 간혹 의식을 잃는다. 얼굴과 팔에 붉은 반점이 돋기 시작해 온몸으로 퍼진다. 발병한 지 하루 이틀이 지나면 작은 반점이 콩알만 한 고름 물집으로 바뀐다. 8~9일이 지나면 물집이 굳어 딱지가 생기는데 회복되면서 떨어진다. 딱지가 떨어진 자리에는 깊은 흉터가 남아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딱지가 콩알처럼 생겼다 하여 일본인들이 ‘천연두’로 이름 붙인 두창의 증상이다.

 19세기 말까지 두창은 홍역처럼 누구나 평생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질병으로 인식됐다. 어린아이 열에 서넛은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또 열에 서넛은 곰보가 됐다. 호구별성이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두창을 순하게 앓은 아이만이 반반한 얼굴을 지킬 수 있었다. 곰보가 많다 보니 등급도 있어 덜 얽은 사람은 살짝곰보, 심하게 얽은 사람은 찰곰보라 했다.

 조선 말기 전설적인 찰곰보로 유사과((劉司果·사과는 벼슬 이름, 본명 미상)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젊어서 기생집에 갔다가 한 기생이 옆 자리 동무에게 “저렇게 생긴 이도 마누라가 있소?”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는 이후 기생집에 발을 끊었을뿐더러, 반질반질한 돌조차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곰보들에게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자기 얼굴을 볼 기회가 아주 드물었고 세밀하게 뜯어볼 기회는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잘생긴 사람도 다를 바 없었다.

 일본에서 우두법을 배워 온 지석영은 1883년 자기 집에 ‘우두국’을 차리고 아이들에게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곰보는 아주 서서히 줄어들었다. 같은 해 조선 정부는 미국인 조셉 로젠봄(Joseph Rosenbaum)을 기사로 초빙해 한강변에 ‘파리국’이라는 유리 공장을 세웠다. 이 유리 공장은 생산품을 내지 못했으나, 이후 판유리 수입은 급속히 늘었고 20세기 초에는 국내 생산도 시작됐다. 판유리는 빛을 거의 완전하게 투과하지만, 한쪽 면에 주석과 아말감을 바르면 또 거의 완벽하게 반사한다. 유리거울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남의 얼굴 보듯 꼼꼼히 뜯어볼 수 있게 됐다. 곰보가 줄어드는 속도보다 유리거울이 확산되는 속도가 훨씬 빨랐으나, 두창이 소멸하고 성형수술이 발달한 덕에 이제 ‘거울보기 괴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증자(曾子)는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 하여 수시로 자기 내면을 살펴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하루 삼십 번 이상 거울 앞에서 자기 외모를 살핀다. 이런 생활문화에서 외모지상주의가 기승을 부리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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