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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의 ‘음식 교향곡’] ‘백만인이여, 서로 포옹하라’

중앙일보 2010.12.11 00:17 주말섹션 14면 지면보기
지난달 말의 어느 오후. 나는 라자니아를 만들어 두고 집을 나섰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 가는 길이었다. 오후 리허설 후 저녁엔 무대에 섰다. 그리고 내 곁엔 스물여섯 살 된 막내아들 민이 있었다.



 #아들과의 무대









베토벤의 초상화. [중앙포토]



이날 음악회의 제목은 ‘2010 공정무역 나눔 콘서트’. 커피를 생산하는 저개발국을 돕는 공연이다. 우리는 수익금을 어려운 나라의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민과 나는 베토벤을 함께 연주했다. 아들은 부쩍 자라 있었다. 스무 살 넘어 지휘자가 되겠노라고 선언한 아이다. 비교적 늦었지만, 빨리 가기보다 멀리 갈 인물이란 걸 믿는다. 지휘자는 그래야 한다. 지휘는 지휘봉만 휘두르면 되는 줄 알고 시작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성취를 위해 일평생 공부해야 한다. 누가 가르쳐줄 수도 없다.



 민은 어려서부터 묵직하면서도 판단을 잘 했다. 두 형에 비해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민이 이날 공연의 좋은 뜻을 이해한 것도 기특했고, 음악을 신중하게 이끌고 나가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공연이 끝나고 멋진 파티를 열어주고 싶었다. 라자니아는 바로 해서 먹기보다 미리 만들어두는 편이 맛있다. 모차렐라·리코타 치즈를 차곡차곡 쌓았다. 치즈 사이사이에 바질을 뿌렸다. 라자니아의 맛을 완성할 토마토 소스는 프랑스 프로방스의 우리 농장에서 재배한 것을 썼다. 이 토마토 소스는 늘 많이 만들어 보관해 놓기 때문에 일 년 열두 달 쓸 수 있다.



 민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차이콥스키 교향곡을 연주한 후 공연이 끝났다. 우리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 시작됐다. 나는 이날 함께한 독주자들까지 모두 집으로 불렀다. 라자니아를 식탁에 내고, 이미 있는 소박한 재료를 총동원했다. 게살을 넣은 파스타와 생선구이, 샐러드를 금세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우리집의 스페셜 메뉴인 찌개를 빼놓을 수 없었다. 파스타를 먹고서 김치찌개와 육개장까지 해치웠다. 아무래도 이런 순서로 음식을 먹는 집은 흔치 않을 듯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한식·양식 다 잘 먹는 아들은 기뻐하며 먹었다.



 #‘합창’과 북녘의 굶주림



 이처럼 기분 좋게 겨울을 시작했다. 이제 또 하나의 연말 공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합창’이다. 4년 전부터 내 연말엔 ‘합창’이 있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합창’을 서울시향과 함께 연주한다.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만난다. 가사는 이렇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백만인이여, 서로 포옹하라!/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 매년 무대에 올리는 이유가 이 가사에 있다. 이 음악에서 나는 형제 즉 북녘 땅의 동포, 그중에서도 어린이들의 굶주림을 떠올린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돕고 싶은 사람이 늘어난다.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이 더욱 안타깝다. 일평생 요리와 먹을거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살아온지라 이들을 배불리 먹여주는 꿈을 꾸고 있다. 2006년 12월 서울시향과 ‘합창’을 시작하며 공연 수익금으로 북한 어린이를 돕자고 제안했다. 인류애를 노래하는 ‘합창’으로 나눔을 실현하는 것, 멋지지 않은가? 매년 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정치적 이슈와 사건이 늘 터졌고, 내 계획은 이제껏 실현되지 못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이 터진 올해도 마찬가지다.



 왜 북한인가? 내 뜻을 아는 이들이 종종 묻는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이상한 일이다. 나는 일생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다. 그런데 북한 어린이들의 배고픔은 왜 남의 일 같지 않을까. 어쩌면 평생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미국·이탈리아·프랑스에 살며 한국이 다른 나라를 돕는 데 앞장서는 날을 상상했다. 그날이 올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여유가 많아져 남을 도울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서울시향의 ‘합창’ 연주가 감동적이라면 기본적으로는 베토벤의 음악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 공연으로 북한 어린이를 도울 수 있게 된다면 바로 이 이유 덕분에 연주가 더욱 아름다워지리라 믿는다. 아들과 함께한 ‘공정무역 나눔 콘서트’가 그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가.



 나는 지금 프랑스 파리에 있다. 여느 때와 같이 일찍 일어나 아침을 맞는다. 지휘자의 공부는 끝이 없다. 나이 들면 좀 편해질 줄 알았더니 웬걸, 공부할 게 점점 많아진다. 새벽마다 악보와 싸울 때 아름다운가게의 공정무역 커피를 마신다. 음악으로 남을 도우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해 본다.



 이번 연말엔 내 생각을 잘 이해하고 따라주는 막내아들과 함께 특별한 것을 먹으며 보내야겠다. 파리에서 질 좋은 송로버섯을 구해가야겠다. 한국에 돌아가면 맛만큼 향이 중요한 이 송로버섯을 아들에게 정성스레 요리해 주리라. 우리 부자의 한 해가 향긋하게 마무리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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