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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인생의 무대 위에 서서

중앙일보 2010.12.11 00:09 종합 34면 지면보기



크고 화려한 무대에 설수록 상처투성이다
때로 낮고 초라해 보이는 무대로 내려서라
거기서 생명력과 자존감이 다시 싹트게 하라!



정진홍
논설위원




# 연극배우 박정자! 그녀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난가을 ‘33개의 변주곡’이란 연극의 주인공 캐서린 브랜트 역을 준비하다 중도에 그만뒀다. 그후 그녀는 한동안 무대에 서지 않은 채 남들이 하는 연극무대만을 조용히 찾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전 처음 연극할 때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고자 스스로 유랑극단의 일원이 됐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자 일흔 나이를 눈앞에 둔 그녀가 지난달 25일 경기도 포천을 시작으로 이달 28일까지 단양·함안·양평·청송·성주·고창·부안·장흥·곡성·청양·영덕·평창에 이르는 13개 시·군을 돌며 모두 32회에 걸쳐 뮤지컬 ‘어머니의 노래’ 전국 순회 공연에 나선 것이다. 지난 일요일 오후, 그녀를 보기 위해 일부러 양평군민회관을 찾았다. 비록 작고 초라한 무대 위일지언정 그녀는 거기에서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났다. 배우로서의 근성과 마음가짐을 바닥부터 새롭게 해 스스로에게 다시 할 수 있다는 속 깊은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시키려 몸부림치는 그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국회의원들도 국회라는 무대 위의 배우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일 년에도 몇 번씩 국회라는 신성한 무대를 아수라장과 격투장으로 만들어놓는 데 주저함이 없다. 도대체 그 놀라운 연출력과 연기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나마 참신해 보이던 초선 의원들마저 이 국회라는 무대 위에서는 모두가 망가지다 못해 거의 자해 수준이다. 한데 그들의 일그러진 표정과 거친 몸짓에서 이것 하나를 발견했다. 다름 아닌 불안의 그늘과 자신감의 결여다. 국회라는 무대에 선 지 몇 해가 지났건만 이렇다 할 모습을 선거구민과 국민, 그리고 역사 앞에 내놓지 못했다는 초조함과 이러다 다음 번 공천은 물 건너 가겠다는 불안감, 나아가 그에 따른 자신감의 결여가 그들로 하여금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그렇게라도 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각인하려는 듯 오버 액션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어 안쓰러웠다. 그들이야말로 유랑극단 버스를 타고 장터를 돌아다니며 정작 그런 자신을 보고 국민이 뭘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생생한 육성으로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배우만 무대 위에 서는 게 아니다. 누구나 저마다 자기 인생무대의 배우다. 사업에 실패하고 그 후유증으로 잠시나마 감옥살이도 해야 했던 이가 있다. 그가 오늘 생애 첫 연극무대에 오른다. 서울 광진구 나루아트센터에서 펼쳐지는 손턴 와일더 원작의 ‘우리 읍내’란 연극이다. 서울시극단에서 마련했던 시민연극교실 1기생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아마추어 연극이라지만 비록 서툰 몸짓과 어눌한 대사일지라도 그에겐 인생 최초의 연극이자 자기 인생 자체의 역전극을 시도하기 위한 진한 몸부림이리라. 그 인생의 무대 위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허세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울 만한 자존감과 자신감의 새 묘목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기 삶에 대한 진한 애정을 거름 삼아 제대로 심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크고 화려한 무대에 서는 사람일수록 속살은 상처투성이다. 다만 그것을 겹겹이 에워싸 감추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에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그 독을 빼고 마음속 깊은 상처를 치유하려면 때로 낮고 초라해 보일지언정 정직한 자기만의 인생 무대로 내려서야 한다. 거기서 스스로 갑옷처럼 겹겹이 걸쳤던 교만과 허세를 벗어놓고 진정한 자기를 담담하게 마주해야 한다. 그러면 자기 속의 죽어가던 생명력과 자존감이 다시 싹을 티운다. 화려한 명성의 국민배우든, 국회라는 무대에 선 국회의원이든, 사업에 실패해 재기하려 몸부림치는 사업가이든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내 인생의 진짜 무대는 아직 막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 다시 한번 내 인생무대의 막이 오른다. 스스로를 격려하며 겸허하지만 당찬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고 무대에 오르자. 그런 당신은 주목받고 환호받으며 갈채받을 자격이 있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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