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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차도남’

중앙일보 2010.12.11 00:06 종합 35면 지면보기








도시는 늘 분주하고 차갑고 고독하게 그려졌다. 사람들은 “아침에 우유 한 잔, 점심엔 패스트푸드”를 겨우 입에 쑤셔 넣는다(신해철, ‘도시인’).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곳은 “러시아워 속에서 러시아워 속으로, 스모그 속에서 스모그 속으로 걸어”가는 일상의 반복이다(최승호, ‘러시아워’). 그래서일까, 도시는 눈이 내려도 “전쟁처럼 내리”는 스산한 곳이다(기형도, ‘도시의 눈’).



 이런 도시의 이미지는 요즘 가장 빈번히 쓰이는 인터넷 신조어 중 하나인 ‘차도남’에도 녹아 있다. 차도남은 ‘차가운 도시 남자’라는 뜻이다.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도 차도남 현빈의 매력 덕에 시청률 20%를 넘었다. 특징은 이렇다. 전문직, 워커홀릭, 영어 능통, 전자기기에 대한 지식, 커피나 와인 등의 고급 취향. 세련된 옷차림은 물론이다. 이 모든 요소가 모여 어딘지 모르게 차가워 보여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남자, 차도남을 이룬다. 유의어는 ‘까도남(까칠한 도시 남자)’이다.



 차도남의 결정적 특징 하나 더. 자신의 여자에게 따뜻하다. 이런 이유로 1940년대 할리우드 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캐릭터에서 그 원형을 찾기도 한다. ‘말타의 매’ ‘빅 슬립’에서 연기한 고독한 터프가이, 하드보일드 탐정 말이다. 비딱하게 문 담배, 좀처럼 웃음을 찾기 힘든 표정, 이 세상엔 단문(短文)만 존재한다는 듯한 냉소적 말투. 하지만 불친절해 보이는 남자에게도 레닌 식으로 말하면 ‘약한 고리’가 있다. 사랑하는 여성이다. 남자의 트렌치코트와 중절모를 추억상품으로 남긴 ‘카사블랑카’는 그 극치다. 보가트가 연기한 주인공 릭은 사랑하는 일자(잉그리드 버그먼)와 일자의 남편에게 미국행 여권을 넘기는 가슴 아픈 선택을 한다. 멋있지만 슬픈 남자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위대한 영화』에서 이렇게 썼다. “보가트는 냉혹하기만 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초연한 척하면서 자신의 낭만적인 성향을 감춘다.”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이 연기하는 차도남은 안하무인 재벌2세지만 가난한 스턴트우먼 하지원을 사랑한다. 하지만 능력과 취향, 자상함을 두루 갖춘 차도남은 불행하게도 현실엔 없는 남자다. 행여 차도남을 지향한다면 허세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어디 차도남 안 나타나나 기다린다면? 그건 더 나쁘다. ‘56억7천만 년’(함성호)보다 더한 고독의 시간이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될지 모르니.



기선민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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