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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가요무대가 뽑은 최고 국민 가요, ‘그때 그사람’의 심수봉씨

중앙일보 2010.12.11 00:06 주말섹션 4면 지면보기
TV 프로그램 ‘가요무대’가 지난달 ‘최고의 국민가요’를 발표했다. 방송 25주년을 맞아 전국 시청자 7100여 명에게서 추천을 받았다. 결과는? 제작진의 허를 찔렀다. 가장 많이 방송된 가수 백난아의 ‘찔레꽃’이 1위가 아니었다. 심수봉의 ‘그때 그사람’이 왕좌에 오른 것이다. 하늘이 내린 비음(鼻音), 처연한 곡조, 절묘한 가사···. 심수봉표 노래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들이다. 하지만 심씨는 ‘+α’를 얘기했다. ‘결핍, 연민, 박탈감’이 노래의 에너지가 됐다고 했다. 그것은 심씨의 인생 일부이기도 했다. 국민가요 1등에 선정된 소감을 들으러 서울 논현동의 자택을 찾은 9일 ‘가수 심수봉’은 없었고 ‘인간 심수봉’이 앉아 있었다.


“갓난아기 때도 발가락으로 박자 맞췄대요”

글=김준술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 1등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았겠습니다.



 “사실 제가 그동안 ‘가요무대’엔 안 나갔어요. 가요 수준이 낮기 때문이에요. 가사나 이런 것들이요. 그래서 프로그램에 대한 매력도 잃었지요. 섞이고 싶은 마음도, 출연할 마음도 없었고요.”



● 이번엔 TV를 보니 출연을 했던데요.



 “방송사에서 ‘콜’이 오는데 매니저가 제 출연을 거부하면 남들은 ‘도도하다’ ‘건방지다’ 그러겠죠. 하지만 음악적으로 선별해서 무대에 서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이번엔 남편에게 자문을 했는데 ‘대중들의 의견을 받아 순위를 매긴 거니 나가야 된다’고 해서 출연을 했죠. 나가서 보니 잘한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제 노래를 불렀다면 가요 팬들에게 예의가 아니었겠죠.”









1970년대 말 심수봉씨의 모습.



●‘그때 그사람’이 왜 그리 인기가 많은 걸까요.



 “1970년대 말 어려운 시절에 나온 노래죠. 그때 가요라는 게 사람들에게 위안을 줬거든요. 힘들 때 위안에 대한 추억은 편안할 때의 추억보다 더 오래 남지 않을까요. ‘위안의 추억’ 그런 힘이 노래에 담긴 것 같아요.”



● 심수봉씨 삶도 쉽지 않았죠.



 “사실 데뷔 이후 매니저도 제대로 없이 음악 활동을 해왔죠. 1978년 2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자작곡 ‘그때 그 사람’으로 입상하고, 이듬해 2월에 정식 음반을 냈어요. 그러다 10월에 큰 타격을 받고···. 아시잖아요. 그 얘기는 절대로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제가 그 사건 때문에 밥 벌어먹고 산다고 말하더라고요. 정말 몰상식한···. 당시 방송 출연 금지 등으로 음악 활동에 큰 지장을 받았지만, 요즘 생각하면 어려움을 겪은 게 자산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생각도 들어요. 제 음악의 주제가 가볍게 갈 수 없었던 배경이 된 거죠.”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심씨는 심한 후유증을 앓았다.)



● 속에서 분노가 치밀진 않았나요.



 “그때는 정말 원망을 많이 했어요. 사생활까지 다 침범당하고. 세월이 흐르고 나니 모두 운명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방송 금지당했던 것도 지금 돌이켜 보면 고마워요. 그런 게 아니었다면 당시 그런 힘든 상황을 다 어떻게 감당했을까요. 어려움은 저한테 거름이 됐어요.”



● 1984년 방송 금지가 풀리면서 노래 ‘무궁화’를 불렀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다시 금지시켰다죠.



 “대통령이 방송사 사장에게 ‘무슨 그런 가사가 떠돌아다니냐’고 질책했다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듣긴 했어요. 어떤 부분이 문제됐다더라? 뒷부분에 ‘포기하면 안 된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게 아마 민주화 운동을 부추기는 표현으로 오해됐나 봐요.”



● 참, 힘든 시절이었군요. 소설가 김훈씨 글에 이런 게 있어요. ‘심수봉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그 여자의 결핍의 애절함에 의해 남자인 나 자신의 결핍을 깨닫고, 그 결핍이 슬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공감합니까.



 “정확하게 너무 시적(詩的)으로 잘 표현해주신 것 같아요. 아, 정말 그렇네요. 왜냐하면 제가 연민이란 감정에서 못 벗어났었거든요. 연민이란 건 결핍에서 오는 것이고요.”











● 결핍이란 어려서 외롭게 자란 걸 말합니까.



 “결국은 정체성이 문제죠. 제가 갖고 있는 정체성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친 없이 자라면서 형성됐어요. 아버지 있는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죠. 상대적인 상실감 혹은 박탈감이죠. 제가 또 축복받고 나온 출생이 아니었어요. 또 사춘기 때 집안이 어려워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어요. 옛날엔 여자가 바깥에서 뭘 하면 마치 술집 여자 취급했는데, 그런 상처의 기억이 많아요. 한마디로 ‘거부’당한 거죠. 대접을 제대로 귀하게 못 받으며 살아온, 기독교 용어론 ‘고아(孤兒)의 영(靈)’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문에 저는 어떻게 하든지 사랑받고 싶어하고 그랬어요.”



● 그래도 뿌리 깊은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재능을 물려받지 않았나요.



 (※ 심씨의 증조할아버지는 피리 명인, 할아버지는 판소리 중고제의 대가, 아버지는 민요 수집가, 고모는 승무 무형문화재 소유자였다. 피아노와 각종 악기를 배운 심씨는 고교 때부터 호텔 바와 미군부대 등에서 노래를 했다.)



 “어머니가 늘 얘기하던 게, 저를 낳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소리에 무척 민감했대요. 길에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자다가 눈을 뜨고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 잠들곤 했대요. 또 노래 소리가 나면 발가락으로 박자를 맞췄대요. 빠른 음색엔 빨리, 느린 곡엔 느리게요. 제가 지금도 리듬감이 강해요. 드럼도 쳤지요. 그런 저를 보고 어머니는 악기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어요. 일본인들이 시골 학교에 남기고 간 피아노가 한 대 있었는데 거기서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죠.”



● 직접 작사·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 실력이 그냥 나온 게 아니군요. 노래를 만들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건 뭡니까.



 “저는 가사에 신경을 많이 써요. 가사에 전달력을 불어넣어 음을 붙이는 게 가요예요. 요즘 소리에 대해서 뭔가 터득한 게 있어요. 그게 사람을 묶기도 하고, 묶인 것을 풀기도 하고, 엄청난 파워가 있죠. 전남 광주의 금남로에 가서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듣는데 ‘어~흐흐흐흐’ 하는 한 맺힌 소리를 많이 하는 게 좀 안 좋더라고요. 그게 도시를 자꾸 묶어요. 아픔을, 한을 말이죠.”



● 가장 힘들게 만든 노래는요.



 “가사를 쓸 때 가장 오래 걸린 게 ‘무궁화’예요. 사실 가장 혼란스럽고, 힘들었던 때였죠. 인생에서 나의 삶을 넘어서, 세상이란 게 있고, 나라가 있고, 정치도 있구나 생각했죠. 그런 혼란 속에서 첫 아이를 바라보면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될지, 저에 대해서, 사회와 상황에 대해서 너무나 너무나 마음의 고통이 컸죠. 무궁화 관련 책을 2권 읽고 고민해서 가사를 써 나갔어요. 무궁화 꽃이 사철 계속 핀다고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떨어지면 계속 피우고, 다시 이어서 피우고, 또 피우고 그래요. 그 생명력을 노래한 거죠. 피를 많이 흘린 우리의 젊은이들도 생각했지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 등에서 쓰러져 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같은 가사도 절묘합니다.



 “지인 중에 외항선을 타는 분이 있었어요. 참 불쌍하더라고요, 외롭고. 휴가 갔다 오면 한 달 정도 쉬고 가는데, 인천항에서 부부가 이별하는 장면을 봤어요. 남자는 너무 너무 슬픈 얼굴로 떠나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보낸 뒤 제 차의 뒷좌석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신림동까지 내내 울고 왔어요. 남자는 떠나니 배 같고, 여자는 기다리는 항구 같아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생각이 딱 가사로 떠오른 거죠. 실제 가사는 원래 내용보다는 남자를 좀 비하하는 쪽으로 갔어요, 하하.”



●‘비나리’ 노래는 남편에게 선물한 것이라는데.



 “원래 그 말이 판소리 용어래요. 소망을 뜻하는. 남편이 알려줬죠. 남편은 MBC 라디오 PD였는데 제 친구가 불었어요. ‘수봉이가 PD님을 좋아한다’고요. 쓸데없는 짓을 한 건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인연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혼자 좋아했다가 관두려고 했던 건데, 남편도 친구 얘길 듣고 마음을 열었죠. 비나리 노래를 듣고선 ‘뻑이 갔다’고 하더라고요. 노래 만들고 차 안에서 여덟 번을 불러줬죠.”



● 걸그룹을 비롯해 후배 가수들이 심수봉씨를 ‘롤 모델’로 많이 꼽습니다.



 “대학가요제 출신의 가수한테 ‘가요제가 낳은 스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제 이름은 안 나온대요. 저는 음악적 재능을 갖고 태어났으니, 제가 받은 만큼 얼마나 세상에 뭔가를 해놓고 갔나 이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나마 칭찬받고 대접받는다는 게 굉장히 조심스러워요. 사실 대접을 못 받아도 내 스스로가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 31년간 롱런한 비결은요.



 “뭔가 오래 이룬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에 관계된 문제라고 생각해요. 또 창의력과 관계 있기도 하고요. 그게 끊임없이 부어져야 돼요. 열정이 식지 않아야 하죠.”



● 그런 면에서 요즘 가요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최근 이상하게 트로트가 아예 별도의 장르로 빠졌어요. 예전엔 트로트와 가요가 섞여 있었죠. 트로트는 가요를 4분의 2박자로 표현한 노래였을 뿐이고요. 요즘은 가사도 그렇고, 천하게 자극적인 노래가 많아요. 어린이들한테 가요 부르게 하고 그런 걸 보면 걱정돼요. 저희 아이들도 키울 때 제 노래를 한 번도 들려준 적이 없어요.”



● 자녀들은 음악을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2남1녀를 뒀어요. 막내딸은 첼로를 시켰는데 대학 들어갔다가 나와서, 지금은 연기 공부 하겠다고 다시 대학에 들어갔어요. 아들들은 미술을 좋아했어요. 음악인은 아니에요.”



● 50대 중반인데 피부가 청춘입니다.



 “어머니를 닮았어요. 물론 이제는 관리도 해야 되죠. 신경쓰지 않으면 팬들에게 예의가 아니니까.”



● 심수봉씨 인생을 노래로 만들면 제목은 뭐가 될까요.



 “소명의식이 있어서 어떤 부름을 받고 온 사람을 뭐라고 하죠? 사도? 심부름 온 사람을, 흠···. 메신저? 아마 그런 제목이 되겠죠.”





j 칵테일 >> 피아노 앞에서 다시 ‘가수 심수봉’으로 …즉석에서 ‘미발표 신곡’ 열창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뭐냐고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며



(그때 그사람 중, 1979년)





아주 가는 사람이 약속은 왜 해



눈 멀도록 바다만 지키게 하고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중, 1984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행복했고



(사랑밖엔 난 몰라 중, 1986년)





그녀의 ‘오선지(五線紙)’를 직접 보고 싶었다. 뭇 남녀를 사로잡은 그저 흔한 사령 타령이 아닌 노랫말과 곡조의 원형들을 말이다.



 심수봉씨가 잠시 생각했다. 이윽고 뭔가를 들고 왔다. ‘나의 신부’라는 곡명이 적힌 악보(사진)였다. “아직 발표하지 않은 신곡이에요.” 지난 5월 결혼한 조재형 매니저의 신부를 위해 선물하는 곡이란다. 기자가 물었다. “원래 곡 선물을 자주 하나 보죠.”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매니저가 스페셜한 사람이니까, 큰 도움이 돼주는….”



 사진기자가 악보를 촬영할 때 갑자기 심씨가 팔을 걷어붙였다. “한번 들어보실래요.” 1층 한쪽에 있던 피아노로 성큼 내달려 노래를 불렀다. 발표하지도 않은 곡을 듣게 된 행운이 주어졌다. ‘샤론의 수선화, 백합화 피어, 내 사랑…’. 5월의 신부를 아름다운 동산에 빗대어 표현한 곡이었다. 모던한 멜로디가 귀를 파고들었다.



 앞서 인터뷰할 때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피아노 앞에 앉으니 에너지와 카리스마가 넘쳤다.



 ‘인간 심수봉’은 다시 피아노 앞에서 ‘가수 심수봉’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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