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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6) 아이젠하워의 은밀한 행보

중앙일보 2010.12.09 01:18 종합 10면 지면보기



한국전 종식이 아이크 대선공약
당선자 신분 비공식 방한이라며
한국 정부와 공식 접촉은 피했다
신중함이 이승만의 애를 태웠다



학생들이 1952년 1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환영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권투선수 차림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의 스탈린을 ‘원펀치(onepunch)’로 쓰러뜨린다는 내용이 이채롭다. 대한민국 정부는 아이젠하워의 방문을 계기로 양국의 우호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사진 전문잡지 라이프에 실린 작품이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던 것 같다. 이승만 대통령의 과분한 칭찬도 그랬고, 광장에 가득 들어찬 국민이 보내준 성원(聲援)도 내 분에 넘쳤던 것이다. 나는 얼른 차일 안으로 들어와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정부 차원의 교섭은 계속 이뤄지는 것으로 보였으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결국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려고 대한민국 요인들과 서울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던 중앙청 앞 광장으로 오지 않았다. 이 대통령의 연설은 30분 이상 이어졌다. 그래도 끝내 아이젠하워 당선자 측으로부터 전갈이 오지 않자 군중 환영대회는 그대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선 대한민국의 위상(位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건국한 지 불과 2년 만에 전쟁을 맞았고, 공산 북한 정권의 포화를 견디면서 간신히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대한민국이었다. 내세울 산업이란 게 전혀 없을 정도로 빈궁(貧窮)한 국가에 불과했고, 세계적으로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자체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 수많은 미군이 상륙해 싸움을 벌였던 까닭에 그 나라의 대통령 당선자가 방문한 것일 뿐, 대한민국은 그렇게 일국의 원수를 비롯한 요인들이 모두 기다리는 환영대회에 그 당사자를 오게 할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일천한 경험 탓에 대한민국의 외교부 또한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를 환영대회에 오도록 하는 외교적 교섭에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별 볼일 없는 나라여서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환영대회를 무시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 점은 자세히 따져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었다.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방한 일정 자체를 비공식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스스로 미국의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 당선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나는 그 당시에 아이젠하워 당선자의 성격을 곰곰이 따져보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눈에 깊은 신중함을 담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중에도 그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가 구사하는 말이나 태도 중에 가장 내 인상에 남는 것이 ‘신중함’이었다.



 내가 동숭동 8군 사령부에서 한국군 증강계획에 관한 브리핑을 마쳤을 때 아이젠하워의 대답은 매우 신중했다. 앞에서도 소개한 대로 그는 내가 브리핑한 내용을 듣고 “원칙적으로(in principle) 찬성한다”는 말을 썼다. 나중에 그와 다시 만나서 대화할 때도 내가 선명하게 들었던 단어는 그 ‘원칙적으로’라는 말이었다.



 그는 그 말을 자주 썼다.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은 뒤 선뜻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는 신중함이 풍겨나는 화법(話法)이었다. 그렇다고 상대의 의견을 건성으로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어쨌든 100만 명에 이르는 연합국 군대를 지휘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제2차 세계대전의 최고 영웅이었다.



 그런 다국적 군대를 지휘하면서 대승(大勝)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단과 용기도 필요하지만, 전략적 목표를 완수하기 위한 깊은 인내와 신중함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그 외로운 최고 연합국 지휘관의 자리에서 그런 거대한 작전을 수행했던 아이젠하워 당선자인 만큼 모든 행동에는 깊은 사려(思慮)가 담겨 있다고 봐야 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신중함으로 중앙청 앞 광장의 환영대회 사건을 받아들이는 게 옳았다. 대한민국이 보잘것없는 나라여서 그런 환영대회를 무시한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게 마땅했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 그렇게 그날의 환영대회 사건을 정리했다. 다행히 이승만 대통령 또한 그를 크게 마음에 두지 않는 분위기였다.



 6·25전쟁 초반 과감하게 미군의 참전을 결정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물러가고, 어쨌든 미국 국민의 민의에 따라 신중하고 사려 깊은 아이젠하워가 새 대통령에 뽑혔다. 그는 비록 군인 출신이었지만, 한국전쟁을 신속하게 마무리 지으라는 미국 국민의 여망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 선출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다음의 대안(代案)을 따라 움직여야 했다. 최대한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 대한민국 군대를 증강하는 한편으로, 산업 전반에 걸친 발전 계획도 추진해야 했던 것이다. 그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더 치열하게 펼쳐져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점 때문에 방한 중인 아이젠하워와의 접촉을 다시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아이젠하워 당선자의 행보는 은밀하기만 했다. 본인이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일 뿐이라는 점을 들어 대한민국 정부와의 공식적인 접촉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했다.



 모든 것을 재고 두들겨 본 뒤 넘어가는 그 신중함이 그와의 적극적인 접촉을 원하는 대한민국 최고위층의 애를 태우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12월 3일 미군 부대를 방문해 장병을 격려하고 돌아온 뒤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대통령 당선자로서 비공식적인 방문을 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와의 공식적인 일정을 피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따라서 그가 그 다음부터 어떤 일정을 소화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미군 부대를 방문한 뒤 다시 전선 사령관들을 불러 만나거나, 아니면 수행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또는 아서 래드퍼드 태평양함대 사령관 등과 동아시아 전략을 두고 협의를 벌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일정은 제대로 알려진 게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가 한국을 떠나는 12월 4일 오후 6시 전에는 예의상 경무대를 방문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4일 오전부터 3부 요인과 각료, 3군 참모총장을 모두 경무대에 모이도록 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경무대를 방문할 아이젠하워에게 대한민국의 열정을 알리고, 미국과의 우호를 과시할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아이젠하워는 또 경무대에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경무대의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고 있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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