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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박병춘, 공사판서 구르며 용이 된 화가

중앙일보 2010.12.09 00:26 경제 21면 지면보기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옛날 옛적 얘기를 한 보따리 끌어안고 사는 화가 박병춘(44). 충북 영동 산골짜기 소년이 갖은 시련을 헤치고 뒤늦게 홍익대 미대에 입학한 뒤 각고의 노력 끝에 한국화단이 주목하는 작가로 자리하기까지의 사연은 말 그대로 입지전적이다. 공사판을 전전하며 수십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가 늘 마지막에 달려간 곳은 붓 한 자루가 놓인 종이 앞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시대’에 용이 돼버린 그가 던지는 한마디는 묵직하다. “누군가가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 내가 예술가의 길을 걷는 이유이다.”



‘고무 산수(山水)’ ‘라면 산수’ ‘칠판 산수’ 등을 선보이며 현대 한국화의 미래를 잡아당기고 있는 그의 최대 무기는 맨 밑바닥에서 구른 몸이다. 입에 풀칠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세상을 떠돌며 몸에 새겼기에 그는 그 몸에서 그림을 끌어낸다. 책상 앞에만 앉아있지 않았기에 만사가 두렵지 않다는 그가 나타나면 미술판이 묵직해지는 이유다. 사자머리 화가 박병춘의 인생 유전이 곧 그의 그림이다.



사진= 중앙포토



밤길 30리 걸어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그 산과 나무가 오롯이 그림으로 되살아난다



가난해서 미대는 꿈도 못 꿨지만 공사판 돌면서도 끝내 붓은 놓지 않았다



라면을 닮은 꼬불꼬불한 필선, 밥먹듯 끓여 먹었던 추억이 절로 풀려나온 걸까



호텔에 작품 걸리고 교수 됐지만 밑바닥서 키운 배짱과 희망, 여전하다















화가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작업실도, 화랑도 아닌 호텔이었다. 서울 순화동 라마다 호텔이 화가 박병춘의 전시장이었는데 ‘느낌이 있는 풍경-박병춘 특별전’이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호텔 로비 벽면을 꽉 채운 대작 ‘길이 있는 검은 풍경’은 투숙객들이 앞다퉈 사진을 찍는 인기 코스였다. 횡으로 10m 가깝게 뻗어나간 검은 숲은 보는 이를 확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먹이 뿜어내는 깊은 기운을 걷어내며 숲 한가운데에 난 길을 걸어가는 한 사내의 뒷모양은 처연하면서도 쓸쓸해 보인다. 화가의 자화상일까.



“산골도 그런 산골이 없었죠. 초등학교 다닐 때 분교를 다니다가 본교로 전학을 갔는데 당시 홍익대 조소과를 다니다 중퇴한 미술교사가 한 분 계셨어요. 어찌나 좋던지. 밤 9시까지 남아서 수채화 그리고 글씨 쓰다가 혼자 30리 길을 노래 부르며 집까지 걸어가던 길이 저렇게 어두웠죠.”



그가 그리는 산수화는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걷고 달리던 고향집 뒷산의 풍경에서 시작한다. 나무는 그의 친구였고 스승이었다. 손금처럼 산과 나무를 몸과 마음에 새긴 그에게 산수는 숙명 같은 화두다.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에 쉽게 마음을 내주고 스며드는 것이 이런 진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고 그는 말했다. 라마다 호텔이 그에게 ‘박병춘 객실’을 제안한 것도 투숙객들의 호응 덕이다.



“외국 호텔에 가보면 한 화가의 그림으로 꾸민 방을 만들어 이름을 붙인 뒤 그 예술세계를 집중해 조명하죠. 우린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했어요. 일단 1차로 3~4명 화가 방을 만든 뒤 일반 객실보다 돈을 조금 더 받고 그 이익으로 작가들을 후원하는 거죠.”



그가 이렇듯 작가들이 맘 놓고 작업할 수 있는 환경 만들기에 제 일처럼 나서는 건 자신의 뼈아픈 젊은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려야 살 수 있는 사람에게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건 고문이자 형벌이라고 그는 표현했다.









위쪽부터 빨간 버스가 있는 풍경, 채집된 산수2, 노란 길이 있는 풍경



“집안 형편이 안 좋아서 공고를 나온 뒤 바로 취직을 했죠.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통했지만 미술대학을 간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어요. 직장 다니는 틈틈이 야외로 나가 사생하는 일로 답답한 마음을 풀었죠. 자전거로 전국 일주도 했고요. 그때마다 제 가방엔 붓과 벼루가 들어 있었어요. 홀로 사색하면서 용감해지고 세상 사는 게 두렵지 않았어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죠. 수원, 대전,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녔고 집에 내려가 농사일을 돕기도 했어요.”



그는 이때의 경험이 도시의 차가운 계산과 농촌의 따듯한 감성이 뒤섞인 ‘박병춘 표 풍경’의 작품 바탕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몇 년에 걸쳐 낮에는 공장에 다니고 밤에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던 그는 마침내 스물세 살 나던 해 ‘미술대학을 가야겠다’는 인생의 결정을 내렸다.



“예술고등학교에서 몇 년씩 전문 훈련을 받은 동생들과 겨루려니 기가 막히더군요. 막일로 단련된 깡다구로 밀어붙였죠. 제가 홍익대 미대에 합격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저밖에 없었을 겁니다.”



삼촌뻘 만학도의 집념은 대단했다. 화선지를 몇백 장씩 사서 밤낮없이 그림만 그렸다. 기존 동양화를 답습하는 강의실 분위기가 너무 답답해 혼자 실험 작업에 몰두했다. 뜻이 맞는 이들끼리 ‘동풍(東風)’이란 전시회를 기획한 것이 2002년이었다. 틀에 갇혀 있는 한국화의 표현을 확장하자는 젊은 화가들의 움직임은 2010년 오늘의 한국 화단을 만든 큰 힘이 됐다.



“며칠 전 사비나미술관에서 끝난 제 개인전은 지난 10년을 마무리하는 일종의 쉼표였어요. 검은 비닐봉지 수만 장으로 그린 ‘비닐 산수’, 아버님이 공사장에서 주워다 주신 돌로 조성한 ‘섬’, 곧 지워질 칠판에 백묵으로 그린 ‘산수 공부’, 포장용 청테이프로 만든 바다, 벽면에 산수를 그리고 천장으로부터 늘어뜨린 흰 천과 물을 조합한 ‘폭포’ 등 전 한국화건 동양화건 뭐든 우리 감성을 건드리는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미치게.”



그는 ‘변화무쌍한 산은 정복되지 않는다’며 그런 산이 되고 싶다고 했다. ‘창조는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생각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꼬불꼬불한 필선이 라면을 닮았다 해서 ‘라면 준법’이라 이름 짓는 그의 패기는 도저하다. 밥 먹듯 끓여먹었을 라면의 추억이 그의 팔에서 붓으로 저절로 풀려 나온 건 아니었을까.



지난 주말, 내년 봄 졸업을 앞둔 덕성여대 4학년 학생들과의 마지막 수업이 있다기에 청강생으로 끼어들었다. 호랑이 선생님을 상상했건만 의외로 박병춘 교수의 강의는 부드럽고 절절했다.



“졸전(졸업 미술전)을 끝내고 난 너희들을 보니 착잡하다. 니네는 날 쓸쓸하게 만든 학번이야. 화가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야. 난 제자가 아니라 동료로 너희들을 키우고 싶었는데….”



박 교수는 동료가 되지 못한 제자들에게 ‘과메기에 소주’ 뒤풀이를 제안하면서 다시 배짱과 희망의 박 작가로 돌아가 살짝 귀띔했다. “점쟁이가 그러는데 내가 육십 이후에 세계적인 대가가 된단다. 언제든 동료로 돌아오고 싶은 사람은 다 받아주겠다.”



글=정재숙 선임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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