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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조선인삼의 일본 밀반출에 협조한 사람들 (Ⅱ)

중앙일보 2010.12.09 00:08 종합 37면 지면보기


조선 노루. 대마도가 ‘조선약재 조사’ 당시 포획해 정교하게 그린 노루의 모습이다. 왜관은 이 같은 동물들을 포획해 반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자금을 들여 조선인들을 매수해 활용했다. [출처=가즈이 다시로, 『에도시대 조선약재 조사의 연구』]

1721년 7월, 대마도는 조사 사업의 책임자로 고시 쓰네에몬(越常右衛門)이란 사람을 왜관에 파견한다. 그는 동식물의 반출을 담당할 사람과 실물을 얻지 못할 경우 그림을 그릴 화공을 데리고 왔다.

 왜관에 들어온 고시 쓰네에몬은 즉시 조선인 협조자들을 포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주목한 사람은 전직 훈도(訓導) 출신인 이석린(李碩麟)이었다. 당시 이미 환갑이 지났던 이석린은 사업에 참여할 조선인들을 왜관 측에 소개했다. 지방의 아전·의원·승려 등 다양한 출신의 조선인들이 왜관으로 들어왔다. 일본 측 자료에는 이 주부, 박 첨지, 현오(玄梧), 치백(緇白), 이 참봉 등 조선인들의 기록이 나온다. 승려를 끌어들인 것은 그들이 늘 산속에 거주하므로 동식물에 대해 해박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왜관은 이석린을 비롯한 조선인 협조자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뿌렸다. 그들에게 사례금을 선금으로 주고, 출장비, 동식물을 입수하는 데 드는 비용, 그것을 왜관으로 가져오는 데 소요되는 운반비 등을 모두 부담했다. 돈의 위력이 컸던 때문일까. 조선인 협력자들은 왜관에서 가까운 경상도는 물론 멀리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나아가 각종 동식물들을 포획해 왔다. 왜관의 일본인들은 입수된 동식물의 크기를 측정하고 정교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표본용으로 말린 잎사귀·뿌리·열매 등 식물들의 표본과 박제로 만들어진 동물들이 속속 일본으로 보내졌다.

 사업이 시작된 직후인 1721년 10월, 대마도의 도주(島主) 소 요시노부(宗義誠)는 왜관이 반출한 조선 인삼을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진상한다. 오동나무 상자에 조선 흙을 담고, 흙이 마르지 않도록 이끼까지 깔아 인삼 모종을 조심스럽게 운반했다. 대마도는 1728년까지 35뿌리의 인삼 생근과 60알의 씨앗을 쇼군에게 진상했다.

 일본 측은 반출한 조선 인삼을 각지에 심어 시험 재배에 들어간다. 재배를 거듭하면서 일본은 18세기 전반 마침내 인삼의 국산화에 성공한다. 이윽고 ‘오타네 닌징’이라 불리는 일본 인삼이 대량으로 보급되었고, 조선 인삼의 대일 수출은 중단되었다(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 그리고 18세기 중반 이후 인삼 수출이 막히면서 조선으로 들어오던 일본 은의 양은 격감한다.

 조선 정부는 1721년 이래 30년 동안 계속된 일본의 ‘조선약재 조사사업’의 존재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경종부터 영조 초년까지 이어진 격렬한 정쟁 때문이었을까? 조선 정부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은 조선인들을 매수해 조선의 산야를 휘젓고 다녔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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