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224> 세기의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중앙일보 2010.12.09 00:06 경제 18면 지면보기



전쟁 중 작품 숨길 곳 찾은 구겐하임, 가치 없다며 거절한 루브르 박물관





피카소·마티스·몬드리안·칸딘스키·클레·에른스트·브랑쿠시·콜더·폴록…. 현대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거장들은 공통적으로 한 여인에게 얼마간 빚을 졌습니다. 세기의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1898~1979)입니다 그는 기존의 미술관과 컬렉터들이 외면한 현대 미술의 둥지가 되었습니다. 드라마틱한 그녀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창문입니다.



이경희 기자



미국 광산 재벌이었던 아버지, 타이타닉 침몰로 사망









알렉산더 콜더의 모빌 작품과 함께 있는 페기 구겐하임.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 제공]



페기 구겐하임은 1898년 뉴욕에서 유대계 광산 재벌가의 딸로 태어났다. 그가 기억하는 유년기는 외롭고 서글프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자녀들에게 고상한 취향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던 아버지 때문에 페기는 15세가 될 때까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가정교사에게 배웠다.



아버지 벤저민 구겐하임은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로 숨진다. 타이타닉호에 타기 전 아버지는 형제들과의 동업에서 손을 떼고 독자적인 사업을 벌였기에 사망과 동시에 막대한 재산을 잃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구겐하임가의 ‘가난한 친척’이란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페기는 4만5000달러를 상속받는다. 훗날 역시 부유했던 외가로부터 거액을 상속받는다. 그리고 그 돈은 죽는 날까지 현대미술의 후원금으로 탕진된다.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20대 초반 무렵 어머니의 반대에도 뉴욕의 한 서점에서 일한다. 일개 점원임에도 향수를 뿌리고 진주 목걸이를 걸친 화려한 차림으로 일했다. 그리고 서점에서 유명 인사와 작가·화가를 만나면서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한다.



그가 최초로 본 추상화는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이었다. 당시 페기는 작품의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어 그림을 이리저리 돌려봤다고 한다. 페기는 작가이자 화가였던 로런스 베일과 결혼하지만 7년 만에 이혼한다. 다만 그를 통해 마르셀 뒤샹 등의 예술가·지식인 인맥을 얻었다. 이후 영국인 지식인 존 홈스와 5년간 동거하며 지적·정신적 배움을 얻었다. 그러나 홈스는 1934년 갑작스레 사망한다.



유럽서 뒤샹에게 현대미술 배우고 미술가들과 교류



홀로 되면서 외로움과 자유를 동시에 얻은 페기는 ‘최대한 유용한 존재’가 될 방법을 궁리한다. 그 결과 37년 런던에 ‘구겐하임 죈’ 화랑을 연다.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그는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에게 조언을 구한다.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민음인)에서 페기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나를 기초부터 교육시켜야 했다. 당시 나는 현대미술의 여러 경향을 구별할 수 없었던 문외한이었다. 그는 나에게 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 추상미술의 차이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 다음 나를 모든 미술가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모두 그를 숭배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가는 곳마다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그때 화랑에서 전시한 작가가 장 콕토, 칸딘스키, 브랑쿠시, 아르프, 알렉산더 콜더, 몬드리안, 이브 탕기 등이었다.



숙부에게 추천한 칸딘스키 작품, 쓰레기 취급 받아









‘Upward’, 칸딘스키, 1929년작.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 제공]



추상회화의 선구자인 칸딘스키와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던 칸딘스키를 페기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칸딘스키는 상당히 수완이 있어 보이는 인물로, 월스트리트 중개인을 연상시켰다.’



칸딘스키는 페기에게 그의 숙부이자 미술계의 큰 후원자인 솔로몬 구겐하임이 자신의 초기 작품을 사게 설득해 달라고 부탁한다. 페기는 숙부에게 편지를 써 보내지만 숙부는 자신의 큐레이터인 리베이 남작부인을 통해 답신을 보낸다. ‘귀하는 자신이 다루는 작품들이 쓰레기이거나 보잘것없는 것임을 이내 알게 될 것입니다.’



페기가 취급한 미술작품들은 당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영국의 세관은 페기가 전시하려던 브랑쿠시, 아르프, 콜더 등의 조각품이 예술이 아니라며 통관을 거부했다. 당시 영국에선 테이트 미술관 관장이 예술품인지 여부를 판단하게 돼 있었다. 이에 대한 미술비평가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지면서 그 제도는 폐기되고 전시는 성공적으로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친구의 헛간에 작품을 숨겼다. 루브르 박물관의 비밀 장소에 1㎥의 공간을 얻으려다 실패한 것이다. 자서전에서 페기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실망스럽게도 루브르 박물관 측은 내가 가진 그림은 보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공간을 내주기를 거절했다. 그들이 보존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그림은 칸딘스키, 클레, 피카비아, 후안 그리스, 마르쿠시, 들로네, 몬드리안, 미로, 막스 에른스트, 데 키리코, 이브 탕기,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빅토르 브라우너, 자코메티, 헨리 무어….’



2차 대전 중 작품 수집 박차, 예술가 탈출도 도와









‘Ocean 5’, 몬드리안, 1915년작.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 제공]



페기가 공격적으로 작품 수집에 몰두한 건 그 전쟁 동안이다. 페기는 미리 찍어둔 작품을 하루에 한 점씩, 모조리 구입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예술가들을 미국으로 탈출시키는 일에도 발벗고 나섰다. 그중 하나가 초현실주의 그림의 대표주자 막스 에른스트였다. 페기는 자서전에서 에른스트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처음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에 체포됐고, 나중에는 공공연한 적이라는 이유로 독일 측에 의해 수용소에 보내졌다. 뉴욕 현대 미술관은 그를 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서류나 돈 같은 것은 보내오지 않았고, 그의 여권은 시효가 다해가고 있었다.’



페기 자신도 유대인이라 1941년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에른스트와 결혼했다. 하지만 에른스트의 바람기 때문에 결혼 생활은 파경을 맞고 만다. 파탄에는 경제적인 문제도 걸려 있었던 듯하다. 에른스트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고미술 수집에 빠져 돈을 펑펑 썼다.



‘나와 퍼첼의 도움으로 뉴욕에서 그림이 점차 잘 팔리고 있었으므로, 그는 이런 종류의 사치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생활비를 한 푼도 내놓지 않았고 소득세 지불용으로도 거의 떼어놓지 않았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페기는 자신이 키우던 개를 에른스트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이혼 후 에른스트는 개를 데리고 가 버렸다. 그리고 몇 해 후 개가 낳은 강아지 두 마리를 페기에게 주면서 돈을 받았다고 한다. 공식적인 남자 외에 그녀를 거쳐간 남자가 서른 명은 된다는데, 페기는 누구로부터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는 못한 것 같다.



뉴욕 ‘금세기 미술’ 화랑 열고 베니스 비엔날레 참여









‘목이 잘린 여인’, 자코메티, 1932년작.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 제공]



뉴욕에 정착한 그는 1942년 ‘금세기 미술’ 화랑을 연다. 당시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프레데리크 키슬러에게 화랑의 인테리어와 작품 설치를 맡겼다. 페기의 요구는 딱 하나, 그림을 액자에 넣지 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키슬러는 페기의 기대 이상으로 혁신적인 화랑을 만든다. 틀에 넣지 않은 그림을 천장에 줄로 매달에 공중에 떠 있는 듯 연출하는 등 전시 기법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면서 ‘금세기 미술’ 화랑은 미국 전위 예술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페기는 공모전을 열어 작가를 발굴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잭슨 폴록이다. 아무런 의미 없이 물감을 흩뿌린 듯한 폴록의 작품을 두고 예술이냐 아니냐 논란이 일었다. 페기는 그런 폴록에게 월급을 줘가며 후원한다.



전쟁이 끝나자 페기는 유럽으로 돌아간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1948년부터 참여해 ‘구겐하임’이란 이름을 이탈리아에 알린다. 당시 그의 전시를 보러 온 미술비평계의 최고 권위자 번하드 베런슨은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현대 미술을 극도로 싫어하던 비평가였다. 페기의 답변은 이랬다.



“저로서는 옛 거장들의 작품을 살 수가 없었고, 어쨌든 누군가는 한 시대의 미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위대한 보물 공개” … 49년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열어



1949년 페기는 베네치아에 거처를 마련한다. 베네치아의 유명한 가문인 베니에르 집안이 짓다 만 저택을 인수해 자신의 거처 겸 미술관, 후원하던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썼다. 관람객은 페기의 침실에까지 들어갔다. 모빌 창시자인 콜더가 특별히 만든 침대 헤드를 보기 위해서였다. 페기의 자서전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천재가 10년 단위로 나올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20세기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많은 천재를 선사했고, 더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독창적이라기에는 너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런 그림들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니다. 지금은 창작의 시대가 아니라 수집의 시대다. 우리가 가진 위대한 보물을 보존해 대중에게 보여 줄 의무가 우리에겐 있지 않은가.’



페기는 이렇게 현대 미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했으며, 자신의 컬렉션을 대중에게 공개한 업적을 남겼다. 여느 재력가들처럼 전문가를 고용해 그림을 고르고 사들이는 게 아니라 직접 예술가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작품을 고르고, 사고, 팔아준 것은 물론이요 예술가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다. 진실로 당대 예술, 예술가와 호흡한 것이다. 그런 노력은 훗날 주류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현재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은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관리하고 있다. 1969년 뉴욕 구겐하임이 페기의 컬렉션을 인정하고 전시한 것이 화해의 계기가 됐다. 페기는 자신의 컬렉션과 미술관을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에 기증했다.



※‘페기 구겐하임 특별전(greatcollection.com.au)’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선 처음으로 서호주 퍼스의 ‘서호주 아트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다. 베네치아에 있던 컬렉션 중 일부를 옮겨왔다. 그중 상당수는 1942년 뉴욕에서 ‘금세기 미술 화랑’을 오픈했을 때 전시한 혁신적인 작품이다. 기사는 이 전시를 참고해 작성했다. 작품 사진 역시 이 전시에 걸린 것이다.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





독자와 함께 만듭니다 뉴스클립은 시사뉴스를 바탕으로 만드는 지식 창고이자 상식 백과사전입니다. 뉴스와 관련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e-메일로 알려주십시오. 뉴스클립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newsclip@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