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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도 되고 ‘독’도 되는 현장 정치

중앙일보 2010.12.07 01:13 종합 12면 지면보기



안상수 파문으로 본 빛과 그늘



지지율 상승 MB, 경찰서 방문 직후 납치 용의자 검거돼



1991년의 일이다. 임기 말 노태우 정부는 대학생 강경대씨가 시위 중에 사망한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제2의 6월 항쟁’으로 번질 거란 위기감이 정권을 휘감았다. 그해 6월 3일 마지막 강의를 하기 위해 외국어대를 찾은 정원식 총리서리가 학생들이 던진 계란과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일이 발생했다. 여론은 반전됐고, 보름여가 지난 6월 20일 시·도의원을 뽑는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압승을 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시를 회상하며 “TV를 보는데 뉴스에 정 총리서리가 밀가루를 뒤집어쓴 모습이 방영되는 걸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토로하곤 했다.









분위기 반전 정원식, 밀가루 세례 후 시위 약화 … 여당 선거 압승



 정치인은 현장 표를 먹고 사는 존재다. 현장 속엔 민심이 있고, 그 민심은 표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 정치가 ‘약(藥)’인 것만은 아니다. ‘독(毒)’의 사례도 많다. 최근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의 연평도 방문 때 불거진 ‘보온병 포탄’ 파문도 그중 하나다. 정치인과 현장, 그 모순과 조화의 장면은 때로 한국 정치사의 물꼬를 돌려놓았다.



 #현장 정치의 빛과 그늘









계란 세례 노무현, 대선후보 때 봉변 “계란 맞은 후 문제 잘 풀려”



 계란세례를 가장 많이 받은 정치인은 아마도 노무현 전 대통령일 게다. 90년 부산역에서 열린 ‘3당 합당 반대’ 시민집회 때 반대자들로부터 계란을 맞는 등 사례가 많다. 하지만 2002년 계란세례는 전화위복이 됐다.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2002년 11월 참석한 전국농민대회에서 연설 중 한-칠레 FTA에 반대하는 농민이 던진 달걀에 턱을 맞았다. 그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 맞아줘야 국민 화가 좀 풀리지 않겠나. 계란을 맞고 나면 문제가 잘 풀렸다”고 해 오히려 열성 지지자들이 늘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도 현장정치의 수혜자다. 대표 시절 155차례나 현장 방문을 했을 정도다. 그중 2005년 1월 강원도 태백의 탄광을 방문한 건 아직도 일화로 꼽힌다. 탄광 측에선 “여자는 갱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지하 3300m ‘금녀의 공간’인 채탄장에 들어가 1시간40분을 광부들과 함께 보냈다. “대전은요”라는 명언을 남긴 것도 2006년 지방선거 유세 현장에서 테러를 당한 뒤다.









정면 돌파 “여자는 갱도에 못 간다” 박근혜, 원칙 깨고 들어가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초인 2008년 3월 일산 한 아파트 단지에서 초등생 납치 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닷새 뒤 직접 일산경찰서를 방문, 조속한 용의자 검거를 지시했다. 대통령 방문 6시간 만에 용의자가 검거됐고, 청와대 홈페이지엔 격려 글이 쇄도했다. 당시 국정운영 지지율이 급상승했다.



 하지만 현장 정치의 피해자도 많다. 특히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등장하는 말실수에 땅을 친 사례도 많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시절인 2002년 5월 한 여고 특강에서 “오빠”란 환호가 나오자 “여기도 ‘빠순이’ 부대가 많다”고 무심코 농을 던졌다가 곤욕을 치렀다. 야당은 “빠순이는 유흥업소 종사 여성을 가리킨다. 억지 쇼 하다 일어난 일”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도 열린우리당 의장이던 2004년 총선 유세 도중 언론 인터뷰에서 “노인들은 투표장에 나오지 않고 쉬셔도 된다”고 ‘노인폄하 발언’을 해 선대위원장직과 비례대표 의원 후보직을 내놓아야 했다.



 #위험, 그러나 숙명









말 실수 “노인들 투표 안 해도 된다” 정동영, 비례대표 후보 사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재래시장이나 재해 현장 방문을 꺼렸다. “쇼”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런 그도 2004년 12월 프랑스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 주둔하던 자이툰 사단을 불시에 방문해 네티즌들의 환호를 샀다. 이처럼 현장정치는 정치인에게 숙명이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는 “국민이 관심을 갖는 사안에 대해 정치인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만큼 필요하다”며 “하지만 보여주기식 이벤트가 문제다.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외교학)는 “트위터나 UCC 등의 중간 매개체로 인해 정치와 현장의 관계가 과거보다 중요해졌다”며 “현장에 대한 충분한 이해, 현장에 대한 이슈와 전문성, 체계적인 준비 없이 대한다면 유권자들의 호응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가영·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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