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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의 세상읽기] 남북한의 앙코르 와트 동행

중앙일보 2010.12.07 00:19 종합 33면 지면보기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남북한 대표단이 지난 주말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유적지를 함께 관광했다. 12세기 석조 건축문화의 정수(精髓)에 넋이 빠져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은 남이나 북이나 하등 다를 게 없었다. 이 험악한 정세에 웬 관광? 그것도 남북한 동반 관광이라니….



 캄보디아 정부는 지난주 프놈펜에서 열린 아시아정당국제회의(ICAPP·아이캅) 총회 참석자들을 위해 폐막 다음 날인 4일 앙코르 와트 특별관광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남북한 대표단도 동참했다. 36개국, 89개 정당에서 온 300여 명의 대표단을 위해 캄보디아는 전세기 2대를 준비했다. 남측에서는 김형오·황진하(이상 한나라당), 정장선(민주당), 이용경(창조한국당) 등 여야 국회의원 4명과 수행원들이 참가했고, 북측에서는 박근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 등 4명이 참가했다. 북측 단장인 김영일 노동당 국제부장은 불참했다. 개인 사정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열린 아시아정당국제회의(ICAPP) 제6차 총회에서 남북한은 연평도 사태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프놈펜=배명복 순회특파원]



 남북한 대표단은 아이캅 총회에서 이틀 연속 연평도 사태를 놓고 날 선 공방을 벌였다. 사이좋게 관광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양측 대표단은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점심식사 시간에도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기자는 직업적 의무감에 북한 대표단과 몇 차례 대화를 시도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북측 차석대표인 박 부부장과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북한에 대한 남한 국민의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 도발을 한다면 남측도 이번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먼저 도발한 것은 남측이다. 연평도 주변 수역에서 포 사격훈련을 하면 대응타격을 하겠다고 분명히 우리는 여러 번 경고했었다. 사건 당일 아침에도 했다. 남측은 이를 무시하고 사격훈련을 계속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경고대로 타격한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민간인이 사는 섬에 포격을 한단 말인가.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무도한 공격행위다. 민간인 사상자까지 발생하지 않았는가.



 “사격 원점(原點)을 타격한 것뿐이다. 민간인이 희생된 것은 유감이지만 군부대에 민간인을 인간방패로 가져다 놓은 남측 잘못 탓이다.”



 -민간인은 시설공사 때문에 군부대에 가 있었을 뿐이다. 더구나 군부대에서 한참 떨어진 민가에까지 포탄이 떨어지지 않았는가.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



 대뜸 그는 미국 탓을 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핵 항공모함의 서해 훈련을 성사시키려는 미국의 의도에 남한이 놀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남한의 외세 의존적 속성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상투적 주장을 늘어놓은 그는 “이런 데 와서까지 정치 얘기냐”며 말머리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은경 동무’로 넘어갔다. 북한 대표의 장황한 조선어 연설을 완벽한 영어로 동시통역해 주목을 받은 26세의 노동당 국제부 소속 통역원이다. 북측 대표단 설명에 따르면 ‘은경 동무’는 북한의 최고 수재들이 모인다는 평양제1중학을 졸업하고, 평양의대에서 4년간 공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평양외국어대에 편입, 진로를 바꾼 뒤 3년 만에 영어는 물론이고 중국어·일본어에도 능통하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일본이나 중국 대표단과는 유창한 일본어와 중국어로 대화를 했다. 해외 생활이나 연수 경험 없이 오로지 평양에서 익힌 외국어 실력이란 점에서 재능이 더욱 돋보인다고 박 부부장은 자랑했다. 단체관광 도중 각국 대표단원들은 훤칠한 키에 미모까지 갖춘 ‘은경 동무’와 서로 사진을 찍으려고 난리였다.



 이번 총회에서 먼저 화살을 쏜 것은 남측이었다. 회의 첫날 오전 연설에서 김 전 국회의장은 연평도 사태를 거론하며 북한을 강력히 성토했다. 그러자 북측은 오후 연설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다. 김 전 의장이 연평도 사태를 짧게 언급한 데 비해 북측 대표는 연설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할애했다. 북측의 반격은 ‘은경 동무’의 탁월한 영어에 힘입어 회의장에 효과적으로 전달됐다. 첫날 상황만 놓고 보면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꼴이고, 북측에 변명 기회만 제공한 셈이었다. 이튿날 남측은 황 의원을 내세워 ‘융단폭격’에 나섰다. 연설의 3분의 2를 대북 공세로 채웠다. 1968년 청와대 기습에서 천안함 폭침까지 북한의 도발적 만행이 일일이 열거됐다. 기세에 눌렸는지 더 이상 북한의 재반격은 없었다.



 아이캅은 ‘International Conference of Asian Pol­itical Parties’의 약자다. 정당 간 교류와 협력을 통해 아시아 국가 간 상호이해와 신뢰를 증진하고, 역내 평화와 공동번영을 추구한다는 취지로 10년 전 창설됐다. 아시아 각국을 돌며 1~2년에 한 번씩 총회를 열어 빈곤·개발·인권·에너지·자원·환경·기후변화 등 글로벌 이슈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는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이번 총회 회의장엔 남북한의 공방전으로 화약 냄새가 가득했다. 연평도 사태의 심각성을 각국 대표단에 각인시킨 효과는 분명히 있었지만 국제회의의 룰과 관행을 무시한 부작용은 감수해야 할 것 같다.



 연평도에 먼저 포탄을 날린 북한에 그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번 총회 폐막과 함께 채택된 ‘프놈펜 선언문’에 연평도 사태와 관련, 북한을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문구가 포함된 것은 국제사회도 이를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 대표단은 여유롭게 앙코르 와트 관광에 동행했다. 북한이란 이름조차 명시하지 못한 그 정도 비난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일까. 하긴 맞은 사람보다 때린 사람이 당당한 법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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