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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인조 정권 뒤흔든 이괄의 난 … 일본만 쾌재를 불렀다

중앙일보 2010.12.02 00:13 종합 33면 지면보기


공주 공산성의 모습. 이괄의 반란을 맞아 인조는 공산성으로 피란해야 했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조선이 처한 위기를 계기로 임진왜란을 저지른 일본의 위세가 다시 높아지는 결과를 빚었다. [사진 출처=공주시청 홈페이지]

1624년(인조 2) 1월 22일, 영변(寧邊)에 머물던 평안병사 이괄(李适·1587~1624)은 대군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단초는 인조 정권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이 역모를 꾀했다며 금부도사를 보내 체포하려고 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평소 조정에 불만이 많았던 구성(龜城)부사 한명련(韓明璉)의 병력과 합세한 이괄의 반란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개천을 지나 강동·황주·수안·평산을 거쳐 순식간에 개성으로 들이닥쳤다. 조정은 도원수 장만(張晩) 등을 시켜 반란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괄의 병력이 1만2000이나 되는 데다 선봉에 선 항왜(降倭·임진왜란 때 투항한 일본군과 그 후예)들의 조총에 밀렸기 때문이다.

 2월 8일, 이괄 군이 서울로 육박해 오자 인조는 피난을 떠나 공주까지 밀려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어렵사리 정권을 잡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후 관군이 분발해 안현(鞍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괄 군 안에서 내분까지 일어나 반란은 요행히 진압되었지만 인조 정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이괄의 난으로 위기에 처하자 인조 정권에서는 일본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반란군의 선봉인 항왜의 돌격에 맞서기 위해 왜관(倭館)에서 일본군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년이 조금 지난 당시까지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만세불공지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왜관을 통한 원조 요청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일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죄’ 때문에 눈치를 보던 태도를 벗어던지고 조선의 ‘우방’으로 행세할 수 있는 호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괄의 반란군이 항왜를 앞세우고, 인조 정권은 그에 맞서 또 다른 일본군을 빌리려 시도하면서 일본의 ‘몸값’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연평도 도발 때문에 심란한 이즈음 두 장면이 떠오른다. 아시안게임 여자축구 결승에서 일본에 패한 북한 선수들이 시상대 위에서 일장기를 외면하려고 돌아선 모습이 하나고, 북한의 포격을 계기로 방위력 증강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일본의 모습이 또 하나다.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위기는 늘 외세의 개입을 부른다. 입만 열면 ‘외세 배격’을 부르짖어온 북한이 스스로 외세에게 멍석을 깔아주고 있는 모순 앞에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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