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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말하지 않는다, 텅 빈 그릇을 제공할 뿐

중앙일보 2010.11.29 00:18 종합 26면 지면보기



‘비움의 철학’ 디자이너 하라 켄야
일본 브랜드 ‘무인양품’ 컨셉트
“내 것 발견 위한 여행 즐기길”







“없는 것이야말로 모든 게 있는 상태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게 오히려 다양한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죠.” “여기 ‘무인양품(無印良品)’ 포스터를 보세요. 우리는 무엇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텅 빈 그릇을 제공할 뿐이죠. ”



 ‘비움의 철학’으로 유명한 세계적 디자이너 하라 켄야(原硏哉·52·무사시노 미술대 교수)가 26일 서울 한남동 일신홀에서 특별강연(아름지기 주최)을 했다. 그는 일본 디자인의 핵심을 ‘비어 있음(emptiness)’으로 요약했다. 2002년부터 아트디렉션을 맡아온 일본 브랜드 ‘무인양품’의 컨셉트도 동일한 개념으로 설명했다.









하라 켄야



 켄야의 이력은 화려하다. 나가노올림픽 개·폐회식 프로그램을 디자인했고, 마쓰야 긴자 백화점 리뉴얼 등을 맡았다. ‘리디자인(REDEISGN)’ ‘햅틱(HAPTIC)’ ‘센스웨어(SENSE WARE)’를 키워드로 한 전시도 기획했다. 건축가·산업디자이너·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참여한 ‘센스웨어’ 전시는 일본뿐 아니라 이탈리아(밀라노)·이스라엘(예루살렘)에서 호응을 얻은 데 이어 내년 4월 북경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백(白)』 『디자인의 디자인』 『포스터를 훔쳐라』 등의 저서도 국내에 나와 있다. 『백』에 실린 에세이는 도쿄대·와세다대 입시에 인용되기도 했다. 27일 오전 리움미술관을 찾은 그를 만났다.



 -‘비어 있음’과 ‘심플함(simplicity)’은 어떻게 다른가.



 “비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기능·형태·용도 등, 모든 게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채움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비어 있음’은 일본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정리한 것도 아니다. 이 같은 개념을 시각화하고 구체화하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미의식이 미래의 자산”이라고 했는데.



 “일본의 예를 들면, 정중하고, 치밀하고, 세밀하고, 간소한 것이 일본적인 것이며 일본의 큰 자원이다. ‘한국다움’은 따뜻한 정(情) 일 수도 있고, 또 다른 것일 수도 있다. 한국 기업들은 해외 진출에 관심이 많으면서 정작 국내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 같다. ‘한국적인 것’을 꾸준히 찾아야 한다.”



 -전문분야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했다.



  “디자이너는 물건을 만드는 게 아니라 체험을 만드는 것이다.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의 느낌과 생각·행동, 그리고 사람들이 맺는 관계까지 헤아려야 한다는 뜻이다.”



 -전시를 많이 기획하는 이유는.



  “전시는 사람이 몸을 움직여 직접 대상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다.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것과 전시장에서 보는 것은 정보의 양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상에 잠재돼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찾아내 체험으로 만드는 것도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요즘 하고 있는 일은.



 “중국에서 도자기 산지로 유명한 징더전(景德鎭)과 인도네시아 작은 섬의 리조트 호텔 디자인 디렉터를 맡고 있다. 집에 대한 전시도 구상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집에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지나치게 획일적이다.”



 이날 한국미술품을 관람하는 그의 발걸음은 달팽이처럼 느렸다. 고미술품 중에서는 청자, 현대 작품 중에서는 서세옥·이우환 작품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부탁했다.“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 남의 것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내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이은주 기자



◆무인양품(無印良品·MUJI)=1980년 일본에서 시작해 현재 한국은 물론 미국·유럽 등지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중저가 생활용품 브랜드다. 가구에서부터 옷과 양말까지, 간소한 디자인과 생산 과정. 장식 없는 포장, 거품을 뺀 가격 등으로 세계인에게 ‘일본적인 브랜드’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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