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 거절당한 후 화내기 전에

중앙일보 2010.11.29 00:10 종합 33면 지면보기






박재영
청년의사 편집주간·의사




살다 보면 이런저런 부탁을 받게 된다. 상대방이 전혀 모르는 사람일 때도 있고,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람일 때도 있고, 아주 가까운 사람일 때도 있다. 나는 결정을 해야 한다. 들어주거나 거절하거나.



 판단 기준은 여러 가지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일인가, 들어줄 가치가 있는 일인가, 들어주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등이 당연히 고려된다. 하지만 이런 ‘교과서적인’ 기준만으로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인간관계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태도가 자칫 ‘냉정한 사람’이라는 평판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그 때문에 상대방의 사정이 얼마나 절박한가, 상대방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 사람인가, 나에게 돌아오는 현실적 혹은 잠재적 이익은 무엇인가 등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적지 않은 경우에는 거절의 말을 날려야 한다. 문제는, 적어도 나의 기준과 상식으로는 거절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거절당한 상대방이 화를 낼 때가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최근 우리 회사에서 펴낸 신간 도서의 파일 일부를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상대방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가 말한 ‘일부’는 그 책의 핵심적인 부분 40여 쪽이었다. 그쪽 회사 사장님께서 직원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해당 부분을 여러 부 복사하라는 지시를 내린 모양인데, 두꺼운 책을 복사하기가 귀찮았던지 파일을 얻어서 출력할 ‘꾀’를 낸 것이었다.



 좀 어처구니가 없는 부탁이었지만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그는 왜 안 되느냐고 되물으며 떼를 썼다. 그건 우리 회사가 생산한 상품이므로 어쩌고저쩌고, 저작권법이 어쩌고저쩌고, 사실 복사 자체가 불법인데 그걸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어쩌고저쩌고. 그랬더니 그는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그럼 e-북(전자책)을 구매하겠다고 했다. 그 책은 아직 전자책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했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요즘 다른 출판사들은 전부 전자책도 만드는데 너희들은 왜 그걸 만들지 않느냐”고 따졌다. 전자책 파일을 구매해 내려받아도 출력은 안 된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짜증이 가득 섞인 그의 목소리에는 ‘더럽게 까다롭게 구네’ 정도의 속마음이 실려 있었다.



 답답하고 억울했다. 부당한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죄는 아닐 텐데, 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궁금했다. 사실 과거에도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섭섭하다’ ‘변했다’ ‘우리 사이에 그럴 수 있느냐’ ‘너무한다’ 등등의 비난(?)을 받았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물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많이 하고, 거절을 당할 때도 많다. 그중에는 좀 무리한 부탁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거절을 당한 후에 서운함을 느꼈던 일도 없지 않다.



 부탁을 하거나 받을 때, 한 가지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빨간 얼굴 테스트(red face test)’라는 방법이 그것이다. 자신의 행동이나 결정이 신문에 났을 때, 혹은 그것을 자신의 가족에게 설명할 때 얼굴이 붉어질 것 같으면 하지 말라는 의미다.



박재영 청년의사 편집주간·의사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