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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명월관의 궁중 요리, 황제가 되어 보려는 욕망을 자극하다

중앙일보 2010.11.22 19:24 종합 33면 지면보기


1930년대의 명월관. 1903년 광화문 현 동아일보사 자리에서 문을 연 명월관은 일제 강점 이후 현 인사동 태화빌딩 자리에 지점을 냈다. 인사동 명월관 지점은 3·1운동 당일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을 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19년 광화문의 본점이 불에 탄 뒤 안순환은 지금의 서울 종로 피카디리극장 자리로 본점을 옮겼다. [사진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00년, 8개국 연합군을 피해 시안(西安)으로 간 서태후는 그 지역의 유명한 요리사를 불러 자기가 먹어보지 못한 요리를 대령하라는 까다로운 명을 내린다. 어떤 요리를 만들어 바쳐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 전전긍긍 고민한 끝에 요리사는 진주 가루로 속을 한 만두를 만들었다. 진주 가루에 맛이 있을 턱이 없지만, 요리사는 진주의 고귀한 이미지를 서태후에게 갖다 붙임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10여 년 전, 베이징의 어느 뒷골목에서 진주 만두를 먹으며 들은 얘기다.

 중국에는 청나라 황제가 먹던 요리라고 선전하는 음식이 많다. 청나라가 망한 뒤 옛 황실 요리사들은 부자들을 위해 요리를 만들었다. 황제들이 어떤 호사를 누렸는지 궁금한 사람들은 맛이 있건 없건 다투어 그런 음식을 먹었다. 반면 일본에는 공공연하게 황실요리를 표방한 음식점이 없다. 왕조국가에서 왕과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은 신민(臣民)의 도리가 아니다.

 1907년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쫓아낸 일제는 궁내부관제를 개정해 대한제국의 황실 사무 전반을 장악했다. 일본인이 궁내부 관리로 임명됐고,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대궐에서 쫓겨났다. 관리 166명, 역원(役員) 3809명, 여관(女官) 232명, 기타 순검 등 317명이 한꺼번에 해고당했다. 이 중에는 물론 황실 음식을 준비하던 숙수들, 황실 연회에 참석하던 약방기생들도 포함됐다.

 1903년 9월부터 명월관이라는 요리점을 내고 영업하던 안순환은 이때 궁중 연회와 음식을 주관하던 궁내부 전선사의 중간 관리였는데, 대궐에서 쫓겨난 요리사와 기생들을 자기 요리집에 끌어들였다. 고종과 순종이 버젓이 눈을 뜨고 있었기에 대놓고 ‘궁중 요리’와 ‘궁중 연회’를 표방하지는 않았으나, 돈 많은 손님들에게는 황제의 상차림을 그대로 제공했다. 명월관의 명성은 나라가 망한 뒤에 더 높아져, 해방 후에도 많은 사람이 ‘명월관 기생’과 ‘명월관 음식’을 평생 소원으로 마음에 품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나 황제에게 바치는 음식은 최고의 솜씨로 만들기는 하지만 최상의 재료를 쓰지는 않는다. 최상의 재료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해에 먹은 음식을 기억하는 황제에게 올해 그만한 재료를 못 구했다고 질이 떨어지는 음식을 줄 수는 없다. 아예 최상보다 한 등급 아래의 재료를 최상급이라고 속이는 것이 벼슬자리를 오래 지키는 방도였다. 그러니 명월관의 스페셜 요리가 황제상보다 나았을 수도 있다. 요즘 사람들은 100년 전 황제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현대의 문제는 욕망이지 물질이 아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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