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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모던 한지 … 서울 한빛미디어갤러리에서 만난 한지 공예

중앙일보 2010.11.22 00:28 경제 21면 지면보기






한지는 어떤 빛이라도 자연스럽고 은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한지공예가 정은하 작가(위). 한지를 나뭇가지 모양으로 오린 뒤 여러겹 겹쳐 생생한 실루엣이 드러나는 조명.



한지 창을 밝히는 빛은 가늘게 흔들리는 호롱불이나 촛불이다. 우리네 빛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한지 창에 비치는, 촛불에 흔들리는 실루엣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깃불이 밝히는 요즘 한지와 빛은 서로 관계가 멀어졌다. 그러다 가장 현대적인 불빛인 LED 조명과 한지가 만났다. 한데 이 조합, 은근히 어울린다. 서울 을지로 한빛미디어갤러리에서 28일까지 열리는 한지공예전 ‘기억 속의 공간’에서다. 최신 디지털 미디어 아트 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갤러리에서 당당히 주인공으로 들어선 한지 전시회에 다녀왔다. 그곳에선 한지공예가 정은하(38) 작가가 만든 작품 50여 개가 전시된다.



글=이정봉 기자 ,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색색 한지와 어울려 따스해진 LED 조명



어두운 갤러리의 벽에는 LED 조명에 한지를 덧씌운 조명 작품이 걸려 있었다. 한지 작품 전시회에서 돋보이는 불빛은 오직 이 한지 조명들뿐이었다. LED 불빛은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한지를 통해서만 제 빛을 내고 있었다. 꽃과 나무를 새겨 넣은 한지 덮개를 쓴 불빛은 그대로 꽃과 나무의 실루엣을 형상화했다. 한지의 두께에 따라 빛의 농도는 달라졌다. 너무 밝은 것이 단점이라는 LED의 빛은 한지를 통과하면서 온순하고 자연스러워 졌다.



빛을 감싸는 한지의 모양새도 우리가 아는 한 가지 모양이 아니었다. 단풍마냥 붉은색도 있고, 황토처럼 누런색 등 빛을 머금은 것도 있었다. 살짝 주름이 잡혀 고급스러운 것이 있는가 하면, 마른 꽃과 나뭇가지가 엉겨 붙어 한통이 된 한지도 있었다. 정 작가는“직접 닥나무를 떠서 한지를 만들고 치자·포도 등 천연 재료를 이용해 염색을 해야 멋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다양한 모양새와 색깔의 한지로 만든 LED 조명은 처음 보는 신비로움을 전해준다.



나무처럼 튼튼하다, 한지로 만든 가구









나뭇가지가 들어있는 듯한 한지 팔각함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이 전시회엔 한지로 만든 조선시대 가구들도 나왔다. 서랍이 달린 이층상·선비상과 복잡한 구조의 경대 등도 모두 한지로 만들었다. 종이로 만든 가구가 무게도 꽤 나가고, 튼튼했다. 정 작가는 “한지를 두껍게 바르는 것만으로는 구조가 약해질 수 있다”며 “한지로 격자구조를 세워 뼈대를 만든 뒤 위와 아래를 덮어 판을 만들고 이 판들을 이어 가구를 짰다”고 말했다. 가구들의 형태도 안정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자연적인 색감이 정겨웠다. 황토색과 검은색이 공존하는 이층장은 목재는 낼 수 없는 독특한 질감이 나타났다. 검은색 한지를 탈색시켜 나온 색감이다. 학 무늬가 새겨진 고동색 경상도 눈길을 끌었다. 전체적으로 300 마리의 학 모양이 조각돼 있다. 빨강·초록 등의 색깔이 학 무늬에 입혀져 있었다. 한지에 학 무늬를 파내고 그 아래 색 한지를 붙였다고 한다. 다리의 모양을 잡기 위해 두껍게 붙여진 한지를 마치 목재를 다듬듯 끌로 파냈다. 정 작가는 “한지로 가구를 하나 만들려면 하루 10시간씩 작업해도 3개월이 걸린다”며“가구 하나만 끝내도 탈진할 정도지만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시 정보 장소 을지한빛거리 안 한빛미디어갤러리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9시,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문의 02-720-1440



한지는 빛을 쉽게 길들이죠



정은하 작가가 본 한지의 매력










한지만으로 만든 경상. 전체 300개의 학문양이 춤추는 듯하다.



나의 작품은 유년 시절 행복했던 기억에서 시작한다. 염색 작업을 하던 아버지와 함께 언덕 위에 올라서 본 세상 풍경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이다. 지금도 우울하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는 숲으로 가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변화무쌍한 자연의 색채는 나를 기억 속의 공간으로 데려간다. 들판에 누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햇살, 그 어른거림을 한지와 빛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래서 전시의 이름도‘기억 속의 공간’으로 정했다. 내 작업은 어린 시절 눈을 사로잡았던 색채를 표현하는게 목표다. 그림 작업을 하다 우연히 한지 공예품을 접하게 됐고,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다. 한지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종이가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소재였다. 한지는 오리고, 찢고, 겹칠 때마다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빛과 실루엣을 표현하는 평면 작품에도 좋지만 입체감도 뛰어나다. 몇장이나 겹치면 가구를 만들 정도로 튼튼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지는 어떤 빛이라도 자신의 질감 속에 사로잡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강렬한 햇살도, 눈부신 LED 조명도 쉽게 길들였다. 한지는 그렇게 적당히 감추고 은근히 드러내는 소재다. 차츰 잊어가지만 그리움이 깃든 소중한 대상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은하 작가는



중앙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2001년부터 한지공예에 한국화의 요소를 결합해 작업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3층 문화상품점에 전통한지공예로는 유일하게 그의 작품이 입점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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