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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항렬자를 지우니 이름의 무게가 가벼워지다

중앙일보 2010.11.22 00:11 종합 37면 지면보기


일본에 망명한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안동 김씨는 조선 말기 대표적인 벌열가문으로 갑신정변 당시 권력 핵심층에 두루 포진해 있었다. 박영효가 철종의 부마였기 때문인지 반남 박씨는 항렬자 ‘영’을 바꾸지 않았으나 안동 김씨는 항렬자 ‘균’을 ‘규’로 바꿨고, 대구 서씨는 항렬자 ‘광’과 ‘재’ 자리에 각각 ‘병’과 ‘정’을 추가했다. [사진출처=독립기념관]

1884년 12월 4일 서울 벌열(閥閱)가문의 자제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법대로 하자면 주모자와 가담자뿐 아니라 그 일족을 모두 처벌해야 마땅했으나, 그러면 조선의 핵심 권력층이 몽땅 붕괴할 지경이었다. 벌열가문은 정변 가담자들을 축출함으로써 이 문제를 나름대로 슬기롭게 풀었다. 주모자들과 항렬자를 공유하던 사람들이 대거 이름을 바꾸어 혈연적 연계의 표지를 지워버렸다.

 가문에서 쫓겨 난 사람들의 이름은 사회적 의미를 잃었다. 김옥균은 남은 평생을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았고,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미국 이름을 새로 만든 서재필도 한국에서 활동할 때는 ‘피제손’이라는 이름을 썼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는 시구(詩句)대로 사람의 이름은 ‘뭇사람’과 구별되는 개인의 ‘독자성’을 표현한다. 그러나 한국인 대다수가 쓰는 세 글자 이름은 본래 온전한 개인의 몫이 아니었다. 맨 앞 글자는 부계로 이어지는 가문의 것이고, 또 한 글자는 가문 안에서 점하는 위치를 표시했으니, 개인이 전유(專有)하는 것은 단 한 글자뿐이었다. 그래서 사적인 관계에서는 ‘자’와 ‘호’라는 별명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같은 이유에서 결혼과 동시에 ‘출가외인’이 되어 가문 내의 위치가 무의미해지는 여성들은 성만 썼고, 모계로 신분이 계승되던 노비들은 아예 성 없이 이름만 가졌다.

 남녀 귀천 구분 없이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이 세 글자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0년대 중반 이후였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로 이름의 사회성은 한 차례 크게 흔들렸으나 해방 뒤에는 다시 족보에 이름을 올리려는 열망이 사회 전반을 휩쓸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세대가 자식들에게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라는 증거를 만들어주려 애쓰는 동안 정작 그 자식 세대는 자기 아이들의 이름에서 항렬자를 지워갔다. 근래에는 부계로만 이어지는 외자 성을 버리고 부모 성을 붙여 두 글자 성을 쓰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는데, 김장·배추·오이·호박·신문·방송 같은 성씨들은 부모 이전 세대에 대한 기억을 담지 못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은, 이름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책임 의식과 깊이 연관돼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 세대 사이에 이름에서 역사성과 사회성을 지우고 개성만 남기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이름의 무게는 오히려 가벼워졌다. 요즘 사람들은 제 이름 더럽히는 것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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